거룩한 신학과 보편적 교회

헤르만 바빙크의 교회를 위한 신학

저자명 Herman Bavin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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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방영민 목사(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  작성일 202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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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캄픈신학교 교수 취임연설과(1883.1.10.)과 교장 이임연설(1888.12.18.)이 담긴 책을 읽고 글을 남겨본다. 그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책의 내용으로 추측해보면 중후하고 진지하고 간절하며 열정적이었을 것 같다. 교수 취임연설은 신학에 관한 원리와 내용과 목적에 관한 것이다. 신학도와 목회자라면 반드시 읽고 신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될 주제이다.
 

바빙크는 ‘신학’이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 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탁월하게 설명한다. 신학의 원리는 성경에 기초하고 있어서 다른 학문들과는 독특한 차별을 갖고 있다.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말하며 설명하는 것인데 그 대상이 피조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학문과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고 신학이 타학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학문의 여왕으로서 타학문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자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신학을 잘 차려진 밥상처럼 가만히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성을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잘 차려진 밥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바빙크는 말하길 “구원에 필요한 지식인 진리는 성경 안에 다양한 질서를 따라 흩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영역에서도 이미 잘라진 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빵을 만들도록 곡식이 자라게 하십니다.”고 표현한다.
 

신학이 성경을 원리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거듭난 자들이 신학을 체계적으로 세우며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와 구원과 교회와 종말에 관한 내용을 집대성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조직신학이 우선이 되고 이로부터 주경신학과 실천신학과 역사신학 등으로 파생된다고 한다. 바빙크는 “신학은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다”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화같이 정리된 진리의 빛을 받아야 하는 의미에서 보수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발전하는 의미에서 진보일 것이다.
 

바빙크는 신학의 목적을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신학은 실천을 지향한다고 한다. 행함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듯 실천없는 신학은 껍데기이다. 신학의 실천은 한 분야에 그치지 않고 교회와 사회와 국가와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삶의 한 자락이라도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지 못할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머릿속에서 지식만 채워주지 않는다. 신학은 삶의 구석구석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지성이 육체를 흘러 넘쳐 행동하게 만든다.
 

그는 말하길 “실천신학은 신학의 면류관”이라고 한다. 신학에 대한 그의 글을 보노라면 바빙크는 행동하는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향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학을 펼쳐간다. 교회는 신학을 보수하고 선포하고 펼치는 병참기지이다. 교회와 신학은 뗄레야 뗄 수 없다. 교회는 신학의 주체로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다.
 

바빙크의 교장 이임연설은 기독교의 우주성과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성경적인 가르침과 교회사를 통해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을 탁월하게 논증하고 설명한다. 교회의 연합 운동이 무엇이고 개신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드러난다. 그의 보편교회에 대한 생각과 우주적인 기독교에 대한 글을 보면 우리가 개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얼마나 패거리 같은지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보편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참교회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교회이다. 기독교는 이 교회로서 신약의 교회가 생겨날 때부터 모든 배제와 혐오를 멀리하고 육신의 껍질과 육체의 한계를 없애고 그리스도 안에 통일된 교회를 꿈꾸어왔다. 그러나 죄와 인간의 탐욕과 정치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분쟁하게 하였다.
 

교회는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인간의 합리주의와 이성은 교회를 사회적이고 인류적인 기관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신앙인데 합리적인 종교로서 인간의 필요를 위해 신을 만들고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위해 종교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교회와 기독교가 우상처럼 변질되었다. 성경에 기반을 둔 교회만이 참교회인데 이성(데카르트)과 자기감정(슐라이어마허)에 기반을 둔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신학이 성경에 근거하고 이성과 자기감정에 의존하지 않듯이 교회도 성경에 근거를 두고 하늘로부터 생겨난 신적기관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생성되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의 취미와 오락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의견을 주장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며 이 땅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경제적 유익을 위해 형성된 기관도 아니다. 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뿐이며 교회는 그 기원과 성격과 목적에 있어서 특별하다.
 

세계의 어느 종교든지 자신들이 믿는 진리가 세계 보편종교와 도덕과 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과연 세계보편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느 종교일까? 바빙크는 기독교만이 세계를 섬기고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낼 수 있는 진리라고 한다. 이 말은 기독교가 십자군처럼 힘과 무력과 권력으로 타인을 압도하고 압제하며 폭력으로 장악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내면에 이루어져서 그 능력이 삶으로 저 멀리까지 강줄기로 흘러가듯 내면에서부터 외면으로 확장되어가는 거룩한 누룩의 역사이다.
 

끝으로 바빙크의 두 연설을 보면, 다른 그의 글을 봐도 느낄 수 있지만, 줄 긋고 암기하고 싶을 정도로 명문들이 많다. 성경과 교회사와 상식에도 탁월하여 비유로 풀어지는 그의 설명에 감탄한다. 필자가 두 글을 보고 떠오른 감상은 ‘거룩한’, ‘교회의’라는 단어다. 바빙크는 신학을 표현하길 ‘거룩한’이라고 표현한다. 그 기원과 내용과 목적이 땅에 있는 것과 다르고, 땅에 있는 것을 온전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신학을 ‘교회를 위한’것이라고 한다. 신학이 기독교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으로서의 기독교 자체이듯 신학은 교회이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가 가득하고 그 진리가 역사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으로서 교회가 선명한 등불이 되게 한다. 아울러 그 등불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이 되어 온 우주가 하나님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는 통로이다.


* 이 북 리뷰는 ‘크리스찬북뉴스’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