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법 전통을 통해서 본 성경 읽기와 묵상

읽는다는 것

저자명 강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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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  작성일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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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라’, ‘책을 읽으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는다는 것’ 자체에 대해 질문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강영안 교수의 ‘읽는다는  것’은 읽는다는 것의 가장 근원으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듯이, 읽을 수 있는 ‘문자’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읽기’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들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저자는 첫 장에서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의 저자인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을 만나서 나눈 대화를 통해 ‘읽는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레슬리 뉴비긴은 ‘당신은 복음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 라고 대답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원래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는 사람들인데 왜 레슬리 뉴비긴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1. 읽는다는 것과 삶의 관계


모든 책에는 그 목적이 있다. 어떤 제품의 사용설명서는 그것을 통해 제품을 사용할 수 있으면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고, 영어를 공부하는 책은 영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바르게 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책으로 읽어야 하는가? 단순히 정보를 취득하거나 소설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 정도로 읽으면 되는가?


만약 성경이 인간의 저작물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삶을 변혁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영어를 마스터 하듯이, 수학을 마스터 하듯이 읽는 책이 아니다. 영어와 수학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지만, 성경은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내가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능동적으로 다가서고 능동적으로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파악하려 할지라도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들을 때, 성경 말씀은 오히려 우리를 말씀 앞에 발가벗겨, 그야말로 방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그로 인해 심지어 상처를 입을 가능성(vulnerability)이 있는 지점에까지 우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113쪽)


모든 읽기는 능동적인 관점으로 읽으면서 비판적인 읽기로 나아가지만, 성경은 능동적으로 읽지만 공감적 읽기를 통해 완전히 수동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성경이 우리를 읽는, ‘상처 입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읽기’라고 말할 수 있다. 레슬리 뉴비긴이 언급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성경을 펼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성경을 읽지만 자기 깨어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자전거를 탈 때 자전거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으로 안다고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도 단순한 정보(Information)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Transformation) 것이다. 성경을 어떤 책으로 읽어야 하는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숨결이 있는 책으로, 인간에게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는 변화의 책으로 읽어야 한다.


2. 문자와 읽는다는 것과 철학의 관계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다. 계시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셔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주시는 방식이 계시인데, 그것은 문자로 기록되어 성경으로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저자는 그렇게 전수된 ‘문자’와 ‘읽기’의 철학적인 관계를 설명해준다. 문자와 읽기에 대해 철학적으로 두 부류의 주장들이 존재해왔다. 첫째는 문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플라톤(Platon)과 같은 사람들은 문자는 그 실체를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외면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 곧장 정신적, 영적인 세계에 닿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면 후설(Edmund Husserl)로 대표되는 현상학은 문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 개인의 지식이 단순히 개인의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공통의 진리가 되려면 전수 가능한 문자로 기록될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과 후설 두 사람은 문자에 대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공통점은 바로 문자 이전에 ‘영혼에 새겨진 것’ 즉 문자를 넘어서 경험하는 영적인 실재를 추구한 것이다.


또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문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고전인 ‘장자’에서도 진정한 도는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없고, 몸소 익히고 깨달아야 한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타인에게 단순한 정보만을 전달하는 보편적 지식이 있지만, 실제 몸으로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익혀서 얻을 수 있는 개별적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의 ‘인격적 지식’과 비슷하다. 폴라니는 인간 안에는 기본적으로 이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의 기반이 있는데 이것을 ‘암묵적 지식’이라고 하고, 이것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의미론적 변화로 이어지고 마지막엔 현상적 변화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런 문자와 읽는 것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한 번에 해결되는 곳이 바로 ‘성경읽기’라고 말한다. 문자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자를 통해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실재와의 조우이다. 진리를 그 자체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문자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은 문자이며 또한 영이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를 배제하며 읽을 수 없고, 문법적으로,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지적인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정보를 주는 책이 아니라 저자가 하나님이 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인격적으로 직접 만나게 한다.


또한 장자와 마이클 폴라니가 말하는 삶으로 경험하는 인격적 지식이 바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성경은 단순한 개인적 변화를 위한 읽기가 아닌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동체적 읽기임을 말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은 단순한 새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펼치시는 구속의 드라마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라 말한다.


즉, 성경을 읽으면서 그 정보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삶을 변화시키는 단순한 자기개발서 정도가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진 것처럼, 문자를 통해 문자 뒤에 있는 영원의 세계 속의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하늘의 진리를 이 땅으로 끌어내려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성경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초청되는 것이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대서사 속에 작은 내 인생이 초대되고 참여될 때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씨름했던 모든 문제들이 하나로 종합되어 이해되고, 참된 인격적 지식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3. 읽는다는 것과 오늘의 적용


레슬리 뉴비긴이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문자를 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의 목적을 호도하고 있다는 말이며 포스트모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새겨들어야 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바른 성경읽기를 위해서 주희(朱熹)의 독서법과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추천하는 렉시오 디비나는 오늘날 성경읽기에서 다시 회복되어야하는 전통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독서’ 라는 라틴어로 중세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읽던 독서방법이다. 렉시오 디비나는 4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성경읽기(lectio)-묵상(meditatio)-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이다.


마지막 ‘관상’에서 수도사들은 자아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체험을 추구했는데, 이 ‘관상’의 단계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잘못된 영성운동으로 비판하며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지만, 저자는 루터가 렉시오 디비나를 응용해서 마지막 관상의 단계를 고난과 영적 씨름으로 바꾸어 적용한 일과, 유진 피터슨은 ‘관상’을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과정으로 변형되어 적용한 것을 예로 들어 오늘날 우리에게 맞는 ‘렉시오 디비나’로 성경을 읽을 것을 권유하고 있다.


유진 피터슨은 관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렉시오 디비나의 마지막이자 그것을 완결 짓는 요소는 관상이다. 렉시오 디비나의 개요에서 관상은 읽고/묵상하고/기도한 텍스트를 나날의 일상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진 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에서도 성경읽기는 단순한 텍스트 읽기가 아니라 이 책을 먹어서 완전히 소화한 상태로 음식이 에너지원이 되어서 생활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4. ‘읽는다는 것’을 읽는다는 것


‘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문자의 그 기능을 회복하게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그분이 펼쳐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대서사로 초청되고 들어가게 된다. 좁은 내 삶의 현실에 크신 하나님을 구겨 넣는 성경의 적용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벧전 1:8)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고백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지만 성경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그 성경의 세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누릴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1문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인간의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읽는다는 것’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성경의 깊은 세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안내장을 받아든 것과 같다. 이 책은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쓴 책이 아니라 ‘읽는다는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책이다.


이 책은 여러 철학자들의 글들 인용하고 있는데, 5장 ‘누가 문자를 두려워하는가’에서 플라톤과 후설의 문자에 대한 이해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에필로그에 나오는 ‘동아시아 전통은 글을 어떻게 읽었는가?’에서 ‘독서의 현상학’, ‘독서의 윤리학’에 대한 내용들이 있고,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에 대한 내용도 3장 ‘객관주의를 넘어 인격적 지식으로’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또 이 책에 나오는 철학적인 부분은 강영안 교수가 2002년에 저술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소나무)을 상당부분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하게 적용하고, 응용하고, 연결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설교나 강의를 할 때 이미 강의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다른 조합과 연결을 통해 다른 주제에도 자연스럽게 인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씨줄과 날줄을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