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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 QT_망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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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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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풀터치 3·4월호


주말칼럼_망한 사랑

 

이성적으로는 멈췄는데 감정이 멈춰지지 않으면 사랑은 더 독해진다. 나는 너를 좋아해. 망했다. 그런데 우린 닮아 있잖아? 아마 안 될 거야. 동질감에 배신당하면 데미지가 더 크다. 그러니까 넌 햇살 같은 사람이나 만나려무나. 치유계 여신으로다가. 그런데 네 미래도 암담하다. 불안함과 강박은 숲에 버리렴. 그전에 네 숲 하나 만드는 것 잊지 말고. 언젠가, 그 숲에 동물이 뛰어다니면, 구경 가겠다. (예언 S-1 가운데) - 권민경 <나와 너에 대한 예언>
 

종영된 드라마 <경우의 수>에는 책에서 옮긴 문장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는 문장은 유명한 『어린왕자』 속 한 줄이지요. “나는 눈을 깜박이는 것보다 더 자주 그가 보고 싶다” 김사라 장편 소설 『풀이 눕는다』라든가,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장강명 장편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등 인용하는 문장들은 대개 달달하고 애틋합니다. 마주한 입술에서 저 말 흐르는 걸 듣는다면, 그 당사자가 ‘나’라면… 쉰 넘은 나이에 그 말을 듣는다면, 자율신경계가 화성의 언어를 자극할지 모릅니다.


“나는 너를 좋아해, 망했다”는 드라마 <경우의 수>에 소개된 또 다른 한 줄입니다. 권민경이라는 젊은 시인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발간하는 ‘시인선’ 100호 기념 ‘맛보기 시집’에 적어 놓은 말이지요. 드라마 대사는 “나는 너를 좋아해. 망했다” 한 줄 뿐이지만, 카메라 앵글은 책에 든 페이지 전문을 보여줍니다. 내가 너를 좋아해서 ‘망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멈췄는데 감정이 멈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더 독해지는 법이던가요. 그만두어야 하지만 그만두어지지 않는 사랑은 그만두어도 ‘망한 사랑’이고 그만두지 않으면 ‘더 큰 데미지’를 만드는 ‘망할 사랑’이 될 겁니다. 그러니 이래저래 망했습니다. 돌아서도 망한 거고, 주춤거려도 망한 거고, 나아가도 망한 겁니다.


기왕이면 달려가 망하는 게 나은 걸까요. 드라마의 젊고 멋진 남자 배우는 그 편을 택합니다. ‘망한’ 걸 알고 달려가는 것인지, 달려가다 보면 망하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인지. 드라마 속 ‘준수’와 ‘우연’은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참고, 지고, 양보하고 기다리는… 그건 착한 사랑이지만, 그늘진 사랑이기도 할 겁니다. 그늘진 사랑이 서로 닮아있다면 ‘아마 안 될 사랑’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지요. “동질감에 배신당하면 데미지가 더 크다”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늘진 사랑’을 걷어내기 위해 “그러니까 넌 햇살같은 사람이나 만나려무나.” 대강의 가능성에라도 밀어두어야 했을까요. 아니면 언젠가 그녀가 그녀만의 숲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구경 가겠다”, 쿨한 약속만으로 괜찮은 걸까요.


‘망한 사랑’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내 나이와 크게 상관없는 ‘젊은이들의 드라마’를 지켜본 건 내가 아는 ‘망한 사랑’ 까닭입니다. 이치에 닿지 않는 사랑 -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사랑을 ‘미쳤다’라고도 하니, 그 ‘망한 사랑’은 ‘미친 사랑’이기도 할 겁니다. 미쳐서 망한 사랑인 겁니다. 이 세상 가장 미친 짓이 제 목숨 내놓는 거라면, 내가 아는 ‘망한 사랑’은 가장 미친 사랑입니다. 이 세상 가장 먼 거리가 ‘하늘에서 땅’이라면, 내가 아는 ‘망한 사랑’은 가장 먼 장거리 연애입니다. 그 멀리서 목숨까지 내놓은 사랑이 말(씀)합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다시 못할 사랑’ 운운하는 이 땅의 사람 - 언어를 고치시는 하늘 고백이 저 ‘망한 사랑’에 가득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개역개정).”




작성자 : 이창순 목사(서부침례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