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저자명 Timothy K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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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조준부 목사(어진내교회) /  작성일 2019-08-12

본문

이번 교회 청년수련회를 준비하며 고민했던 것이 청년들의 삶 속에 내재된 신앙적 갈등에 교회가 어떻게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여러 잣대들이 교회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때에 그 영향력아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청년들은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누림보다는 적당한 회피와 외면의 줄다리기를 반복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수련회를 통해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주제를 심각하게 찾고 있었다.


그럴 때 마침 한 권의 책을 만났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혀 새롭게 된 마음의 표지는 무엇일까요?”라고 시작되는 팀 켈러의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The Freedom of Self-Forgetfulness)는, 보는 순간! 바로 수련회 말씀 준비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정리가 잘된, 게다가 아주 얇은 책이었다.


사실 준비하는 내내 고린도전서 3장 21절부터 4장 7절까지 바울이 일갈하는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관계,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을 통해서 주어지는 자유에 대한 파워풀한 언급은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고 하기 보다는 우선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선물했다.

 

켈러는 이 책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별히 정체성의 문제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이고, 사회문제로서 대두된 수많은 일탈의 배후에는 항상 낮은 자존감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설명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세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회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이제 힘겹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아도 그저 사람들을 이해해주고, 받아주고, 세워주기만 하면 되는, 개개인의 자유만 중시되는 그런 편리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적 상태


이 책은 현대사회의 인간의 본성적 상태는 ‘오만함’과 ‘교만’으로 설명하며, 그 본성적 상태 네 가지를 우선 언급한다.


켈러는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가 처한 상태를 첫 번째로 ‘공허함’으로 규정하며, 그래서 계속해서 무언가로 채우려 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영적교만에서 출발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과 상관없으니 그 자체가 ‘고통’을 겪는데, 그것은 부풀어져야 하고 우쭐해져야 하니 우리의 자아는 계속해서 남의 주의와 시선을 끌고자 하고, 그렇게 되지 못할 때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 자아는 매우 ‘분주하다’고 지적한다. 남의 주의와 시선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니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하고, 계속된 비교와 시기로 만족하지 못하고, 옆 사람보다 더 가져야하니 얼마나 바쁘겠는가?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 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긴 것을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돈 많고 잘 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다.”라고 말했듯이 교만이란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는데서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네 번째로, 공허하고 힘들고 분주할 뿐만 아니라 ‘나약하다’라고 지적한다. 팀 켈러는 우리가 나약한 이유를 마치 부풀어 오른 무언가가 한 번에 ‘펑’하고 터질 우려가 있기에 늘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든든히 확실하게 채워 우월감에 충만해야 되지만 그렇지 못하므로 늘 열등감에 떨어질 우려가 있기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으로 새롭게 된 자기 이해


인간의 본성적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팀 켈러는 사도 바울의 정체성을 지키는 노력에서 제시한다. 제시된 본문은 고린도전서 3, 4장 말씀으로 특별히 켈러가 핵심으로 삼은 구절은 고린도전서 4장 3, 4절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사도 바울이 경험했을 여러 정체성에 대한 문제들을 과연 당사자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늘 공허하고, 채워야 하고, 분주해야 하고, 냐약해야 하는 본성적 자아의 비극을 어떻게 이겨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당시 여러 명예들을 회복하기 위해 자아정체성을 높이는 노력들을 해야 마땅한 것이 우리의 본성의 요구지만 사도 바울의 반응은 말 그대로 ‘고차원적’이었다. 현대 상담심리학의 논조처럼 ‘자존감’문제를 제시하며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놀라운 지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권면한다면 사도 바울은 바로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고 책망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팀 켈러는 사도 바울이 모범적으로 그것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남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좋게 평가하든, 나쁘게 평가하든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스스로 여러 사역들을 통해 열매 맺은 결실에 대해서도 조금도 자랑할 생각조차 없다. 다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평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켈러는 그것이 바울이 발견한 ‘미지의 땅’이라고 말하고 우리를 그 곳으로 초대한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는 고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것도 ‘예전에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하지 않고 ‘지금 현재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둔기로 세게 맞은 듯한 도전을 준다. 그와 같이 기독교 역사상 엄청난 일을 이루신 분도 없는데 그렇게 고명하신 사도가 ‘내가 가장 악한 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그런 죄인이기에 낙심하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팀 켈러는 설명한다. 누구보다 자기 죄의 정체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죄와 자기 정체성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자기 죄 때문에 그 정체성이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또 자기가 쌓아놓은 업적이 우쭐할 만한 일일지라도 그것들과 자기 사역은 절대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가 우리를 ‘미지의 땅’으로 인도하는 길목에서 우리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사실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켈러는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교만을 다루는 장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의 ‘겸손’을 설명한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을 만났을 때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은, 스스로를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통해 진정 겸손해진 사람은, 바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충일한다. ‘복음적 겸손’의 핵심은 자신을 더 생각하거나 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덜 한다는데 있다. 팀 켈러는 그것이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자유라고 말한다.


새로운 자기 이해에 이르는 길


바울이 어떻게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복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까?


앞서 인용된 고린도전서 4장 3,4절에서 그 답을 더 확인할 수 있다. 켈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늘 판단 받고 평결을 받고 사는 것이지만 이미 우리를 향한 최종 판결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평가는 이미 끝이 났다! 이미 하나님은 나를 의롭게 여겨주셨다고 선언하셨고, 이제 내가 관심을 가질 것은 오직 그 것 뿐이라고 말이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한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가 직접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자녀로 맞아들이신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그 평결은 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금 이 평결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받으셨기 때문에 나만의 이력을 쌓기 위한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제 순전히 즐거움 때문에 일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돕도록 협력할 수 있다. 이제는 선행을 하더라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처럼 느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적인 자아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내 자아 정체성은 더 이상 비어 있지도, 남들의 주의를 끌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지도, 남들의 주의를 끌고자 바쁘게 움직이지도, 또 그렇게 해서 채워진 것들이 한순간 날아갈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아를 세우시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