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몸과 예배의 작동 방식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저자명 James K. A.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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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예성훈 목사(은혜의동산교회) /  작성일 2019-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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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Imagining the Kingdom)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는 목회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훈련을 매우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인적인 교회 사역과 교회 개척 준비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기독교 세계관적, 지적 성찰에 중심을 둔 목회적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제임스 스미스가 먼저 쓴 '하나님 나라를 욕망 하라'(Desiring the Kingdom)에서 잘 다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 하라'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제공한다는 목표가 교회와 기독교 대학의 사명으로 부적합하다고 주장했고 그 이유에 대해서 논의 점을 밝혔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제임스 스미스의 전작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논하는 관점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세계관 접근 방식이나 지적 성찰이 틀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부적합성은 그것이 전제로 삼고 있는 성숙하지 않은 인간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에 대한 교육은 지성적인 측면에만 집중함으로서 정서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소홀히 여겨 실제로 우리의 정체성의 뿌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세상에 관해 바르게 생각하도록 우리의 지성을 훈련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우리의 상상력을 바로잡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관 교육의 한계는 우리가 세상일에서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세상의 구경꾼으로의 접근 방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플랜팅가의 주장을 가져온다. 플랜팅가의 주장은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일등 시민이라고 부른 사람들을 형성시키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시민으로서 우리의 행동이 일차적으로 인지적 성찰에 기초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관점' 즉 세계관에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습득된 습관, 무의식적 욕망, 지성보다는 앞선 성향(무의식)에 기초해 있음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은 이런 욕망과 성향이 형성되는 방식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고도로 발전되고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런 관점과는 모순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자신의 기독교적 세계관 교육의 한계에 대한 사례를 코스트코에서 웬델 베리의 책을 읽은 경험을 소개한다. 그는 식품 생산과 소비의 거대 자본의 지배적 체계가 불의하고 건강과 실제 농업에도 유해하게 되기 때문에 이것에 반대하고 건강에 유익하고 정의로운 식생활을 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지역의 텃밭과 농장에서 수확한 유기농 건강한 먹거리 즐기기에 헌신하는 농부이자 작가인 웬델 베리의 책을 읽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코스트코 푸드 코트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이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하면서 심각한 도전에 부딪쳤다고 한다.


사실 코스트코 푸드 코트는 웬델 베리가 주장하는 내용의 정반대가 되는 핵심 장소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자신이 현재 지적으로 알고 추구하고 있는 세계관과는 모순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지성적으로는 웬델 베리의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면서 몸의 행동으로는 대기업 거대 자본의 푸드 코트에서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 모순 말이다. 그는 코스트코에서 웬델 베리의 책을 읽은 경험을 통해 철학적 세계관이 자신의 지성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삶의 습관을 바꾸어 놓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더 철저하게 이 문제를 파고 드는데 세계관이 자신의 삶을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성공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았다. 그는 그 이유를 인간의 행동과 그의 지향성은 대부분 실천에 의해서 빚어진 성향이며, 그것은 보통 무의식적 실재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계관'을 주지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몸으로는 반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관적 삶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주지적 세계관을 단순히 교육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메를로 퐁띠의 '인식의 현상학' 즉 우리 몸이 어떻게 무언가를 알게 되는지를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앞서 '하나님을 욕망하라'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전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피조물, 즉 무엇이든 예배(숭배, 사랑)하는 인간으로서 무신론자는 없다는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예배자이며. 숭배자다 즉 사랑하는(에로스) 자다. 예배(숭배, 사랑)하는 그것이 자아가 된다. 몸이 된다. 결국 인간은 욕망자다. 그 욕망은 신체를 통하여 습관화된다. 무의식의 세계로 뿌리내린다. 이것이 습관화이다. 그리고 이 습관화는 그사람이 예배(숭배, 사랑)하는 대로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배경이 되는 몸'으로서 에로스적 동물의 몸, 즉 특정한 방식으로 나의 세상을 이해하려는 경향을 갖게 하는 축적된 습관과 성향으로서의 '몸의 앎'을 제임스 스미스는 주지적 세계관 교육이 가진 한계의 대안으로 내놓는다. 그 대안은 메를로 퐁티가 산술어적 노하우라고 부르는 몸에 의해 처리되는 것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는 '몸의 앎'으로서 작동하는 마치 상상력이 우리의 오장육부에 더 가까운 것처럼 우리의 뼛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세상의 이해로서 ‘마음의 이해'를 상정한다.


이것은 '이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이성'으로 다시 말해 마음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야기 듣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서사가 어머니의 젖인 양 서사를 들이 마시는데 우리의 정서 감정을 훈련하고 단련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호건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개별적인 감정적 경험과 결과는 감정에 대한 우리의 관념 특히 우리 '감정의 원형'과 '우리 원형'의 서사에 의해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감정적 지각은 단순히 본능적이며 생물학적 반사 작용이 아니라 그것은 '습득된 습관'이자 패러다임을 이루는 이야기 안에서 그 이야기를 통해 학습된 열정적 지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지각을 훈련시키고 방향 짓는 이야기와 서사들은 우리 몸으로 체현된 무의식의 심층의 근원인 마음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배운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예배와 기독교 교육은 근대성의 주지주의에 포로로 사로잡혀 이러한 몸/이야기 사이의 밀접한 관계 즉 상상력과 서사, 신체(몸) 사이의 불과분의 관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함으로서 우리의 상상력을 이끌어내기 보다 지성을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왔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주지주의적 세계관 교육의 한계가 들어났는데도 세속적 예전이 이야기에 의한 형성을 좋아하는 우리의 체현된 성향을 어떻게 암묵적으로 이용해 먹고 있는지를 우리는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면서 대량 소비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의 다양한 모습의 이기주의에 동화되면서 세속적 예전에 무의식적으로 예배하는 이중적 그리스도인들이 양산된 근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그의 책의 제목이 목표하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이다. 여기에 제임스 스미스는 부르디외의 실천 감각으로서 아비투스 개념을 소개하면서 한걸음 더 들어간다. 아비투스는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우리의 성향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습관적 방식으로 이 아비투스는 나 보다 더 크다 즉 이것은 내안에 세계적 공동체적 집단적 성향이라는 것이다. 이 아비투스는 특히 공동체와 제도로부터 아비투스를 습득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데 이 아비투스는 우리가 합리적 성찰이나 의식적 자각 없이 우리의 세상을 구성하게 해 주는 성향의 복합체로 이비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과 매우 비슷하다. 제임스 스미스가 이 브르디와의 아비투스 개념을 자신의 주장에 채용한 이유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자유와 결정론, 지성과 본능을 나누는 이분법을 한계를 탈피하는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제임스 스미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습득이 아니라 기독교적 아비트스의 습득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비투스란 한마디로 우리 몸이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적 경험을 습득을 하면서 얻게 되는 앎의 틀로서 실천 감각과 실천 논리로 체험적 용어로 설명된다. 스미스는 실천감각을 주로 설명한다. 실천감각은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 대한 나의 지각을 방향 지을 정도로 흡수한 공동체적 아비투스라고 말한다. 브르디와는 이러한 실천 감각을 일종의 믿음이라고 부르는데 부르디와의 실천 감각 곧 실천적 믿음의 정의는 정신 상태가 아니며 정해진 교의나 교리를 자의식으로 고수하는 태도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몸의 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실천감각은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몸의 성향이라는 의미에서 믿음이다. 이러한 실천 감각은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 대한 나의 지각을 흡수한 공동체적 아비투스로 하나의 실천 감각을 습득했다는 것은 내가 체현된 믿음들을 들이마셔서 그런 믿음들의 관점에서 나의 세상 빛 나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실천 감각은 행동안에서 작동하는 감각이다.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아는 지식으로 단순히 실천에서 적용하는 지적 명제적 의미의 실천적 지식이 아니라 실천된 믿음인 독특한 감각으로 설명한다. 또한 실천 논리는 신체적 훈련을 통해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논리이다. 지적논리가 아니라  몸의 행동으로 몸에 쓰이는 논리이다. 제임스 스미스가 브르디외의 실천 감각 실천논리의 아비투스 개념을 가지고 주장하려고 한 것은 결국 ‘몸의 앎’과 ‘습관의 형성’에 관한 개념의 상정을 통하여 몸의 성화에 대한 이해를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는 3장 4장에서 성화된 지각을 주제로 삼으면서 결론을 맺는다. 여기서 그는  상상하며 이야기하는 동물로 인간론을 강화한다. 니콜슨 베이커의 말을 빌어서 인간은 평범한 일상적 반복이 어떻게 우리의 존재, 우리가 사랑하는 바, 우리가 행하는 바를 빚어내기 시작하는 더 큰 이야기 안으로 우리를 끌어드리는가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마음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야기 하는 존재로서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존재라는 것이다. 윌리스의 말을 인용하는데 우리는 시공간이 필요한 것처럼 서사가 필요하고 그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의 이야기가 우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이 이야기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서사적 동물로 결국 메를로 퐁티와 브르디외가 주장하듯이 우리 몸과 이야기의 결합체로서 우리의 세계-내-존재를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신체적 기분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사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만들어 낸 때 작동하는 상상력의 논리는 우리의 가장 심층적인 심금을 울리며 그러한 조화는 무의식 깊은 곳까지 울려 퍼져서 우리가 자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조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논증에 의해 설득되기 보다는 이야기에 의해 감동받는다. 우리의 세계-내-존재는 연역적이기 보다는 심미적이며 분석적이기 보다는 서사에 의해 더 잘 사로잡힌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속적이든 기독교적이든 예전적 실천에 의해 우리의 근원적 갈망과 욕망이 빚어지는 예전적 동물로서 이러한 '몸/이야기'의 결합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나아간다. '몸/이야기' 즉 몸으로 체화 되는  성화에 대해서 최신 신경과학적 접근을 통해 설명한다. 이러한 몸/이야기를 마크 존슨의 정의를 인용한다. '의미의 신체적 기초' 즉 육화된 의미로서의 인간 이해를 인간 이해의 미학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세상과 우리의 신체적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만드는 신체적 깊이, 즉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능력의 핵심을 차지하는 무의식적 생각과 감정이라는 거대한 숨겨진 대륙으로서의 몸 이해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의 진정한 의미로서 우리의 세계-내-존재의 유한한 조건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때 스스로 낮추어 맞춰주신 조건, 성령께서 우리를 빚으시고 다시 만드실 때에 바로 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몸은 우리의 뇌, 우리의 환경이 함께 우리처럼 몸을 지닌 피조물에게 모든 의미가 떠오르는 의미로 가득찬 피조물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우리의 몸은 그 몸을 작동하게 하는 육체적 사회적 문화적인 인간의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인간의 뇌가 필요하고 이 세 차원중 어느 하나라도 제거하면 인간은 그 의미의 가능성을 상실 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말로 뇌가 없이는 의미도 없다. 몸이 없이는 의미도 없다. 환경이 없이는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과 뇌 환경은 우리의 경험의 삼발이 의자처럼 기능함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를 새롭게 빚기 위해 성화시키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시고 맞춰 주시며 피조물의 조건을 인식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세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독특한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의미를 만들고 받아들일수 있는 능력의 근원에는 유기체적 환경의 상호 작용이라는 신체적 역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몸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화된 지각을 가진 몸의 실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미 만들기 기초에는 우리 환경에 대한 행동 지향적 자세가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거룩함의 신체적 기초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성화에 대한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결국 성화는 우리 행동하는 몸에 체현된 지각의 습관화를 요구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존슨의 주장을 빌려 와서 성령께서 우리의 신경 지도라고 부르는 것을 재편하신다고 말한다. 신경 지도는 자극이 감각의 장 안에서 인접한 위치를 가로질러 움직일 때 연속적으로 그 자극에 반응하는 일련의 신경세포들을 가리킨다고 말하면서 최신 신경학 뇌가소성 이론에 따라 설명 한다. 뇌신경지도는 끊임없이 재편되거나 그 변화에 맞춰 적응함으로 우리의 환경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결국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고 존슨의 주장에 요약하면 결국 이러한 뇌의 작용은 마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마음 또한 성취한 것이지 미리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정신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조정하고 나눔으로써 상징적 상호 작용에 참여하는 능력을 통해 마음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 마음은 우리가 행동한 그것으로 몸이 반응하고, 뇌로 반응한 모든 것으로 마음이 획득된다는 것이다. 결국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어쩌면 그리스도의 마음, 역시 실천과 형성을 통해 습득하는 무언가 정보의 저장소라기보다는 성화의 경로로서 떠오르는 그 무엇인 것일 거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존슨의 설명을 인용하여 조심스럽게 견지한다. 이것을 인간 이해의 은유의 미학이라고 그는 규정한다.

 

이러한 담론의 흐름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는 것으로 다시 귀결한다. 지금까지 말한 몸의 중요성은 그 몸이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내가 어떤 것을 욕망하겠다고 인지적으로 생각한다고 욕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은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습관으로서 아비투스로 형성되는 것으로 우리의 육체적 구조의 재배열 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 일에서 우리의 위치를 상상하는 방식의 재편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욕망한다는 것은 부르디외의 말처럼 사회적 몸, 삶의 방식에 대한 그 몸의 전망으로 통합되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특정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인 만큼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의 실제적 비판적 해답을 마침내 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앞에서 말한 교육의 목적에 자신의 주장을 연결시킨다.

 

결국 교육의 목적은 어떤 지식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해야 하는 바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사랑의 바른 질서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와 같은 피조물에게 의미란 무엇보다도 먼저 육화(배경이 되는 몸이기 때문에)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먼저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처럼 상상력이 인간의 세계-내-존재에 어떤 의미인가를 평생 연구해 온 리쾨르의 기획과 맞닿아 있다고 하면서 인간 실존의 전 영역은 은유적 발화와 서사적 담화를 아우르는 하나의 거대한 시적 영역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리쾨르의 인간 실존자체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받아드린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인 예전적 인간론을 위해서 일반적 시학에 관한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학, 예전학, 문학, 비평 사이에 더 심화된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건설적인 자원을 마련한 것으로 그 자신의 책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솔직히 나는 스미스의 결론이 아쉽다. 물론 4장에 가서 보다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기는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권이 더 남아 있다. 3부작이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그리고 마지막 결론의 책으로 ‘왕을 기다리며’(Awaiting the King)가 남아 있다.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를 읽고 결론이 아쉽다면 마지막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내게 너무 큰 도전을 주었다. 얇은 책이지만 철학적 담론의 무게는 너무 넓어서 읽기에 쉽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수확은 교회 개척을 준비하는 데 예전의 중요성을 철학적이면서 이론적으로 철저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팀 켈러(Tim Keller)가 말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기반을 정확히 이해한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 서두에 말한 대로 기독교 세계관적, 지적 변증적 성향이 강한 내 자신의 목회 방향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어서 너무나 유익했다. 스미스의 3부작 중 남은 한 권인 '왕을 기다리며'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