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7대죄와 성화의 길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저자명 신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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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이춘성 목사(광교산울교회) /  작성일 202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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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일 밥하고 노동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던 시절, 나는 집에서 매일 한 끼의 식사를 손님들에게 대접 하였다. 당시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나면 남은 음식으로 우리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충분해야 할 음식이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원인은 호리호리하고 고상한 외모의 한 중년 부인에게 있었다. 그녀는 매번 음식을 먹고 또 먹고 더 없느냐고 물어 왔다. 처음에는 내가 한 음식이 너무 맛있어 그런 줄 알고 내심 기분 좋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음식을 더 많이 준비해도 더 달라는 요구는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 중년 부인은 외국에 있는 남편과 자녀들과의 불화로 혼자 한국에 나와 있으면서 매일 전화로 이들과 다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녀의 불안과 분노는 음식을 탐하게 했고, 평상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음식을 먹고서도 그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가 식탁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내가 왜 이러지? 난 평소에는 이렇게 먹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더 줄 수 있나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욕망(desire)의 존재라고 하였다. 그는 사랑을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대상을 욕망하고 욕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인간은 달리 말해 하나님을 욕망하고 욕구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향한 욕망이 중요한 이유는 이 거룩한 욕망이 인간의 다른 욕망을 제어하는 키(key)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그런데 이 핵심 욕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수님은 이어서 핵심 욕망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욕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막 22:39) 이웃을 자기와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사랑이란 핵심 욕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자기 사랑 이상의 사랑, 즉 하나님 사랑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이 왜곡된 욕망이 끊임없이 신자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직시하였다. 그것이 3~4세기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허영 등의 대죄(capital sins) 항목들이다.


이러한 초기 교부들의 죄에 대한 통찰을 현대에 재해석하여 잘 설명하는 책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다름 아닌 고려 신학대원 원장이자 기독교윤리학자인 신원하 교수의 책,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이다.


교부들은 왜곡된 욕망의 사슬을 끊기 위해 매일 죄를 바라보고 다시 십자가를 보는 바라봄의 영성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죄라는 말은 일종의 금기어이다. 이전에 죄라고 불리던 것들은 심리 현상과 정신질환, 연습을 통해 교정할 수 있는 태도의 문제로 사소화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성적 욕구를 무한으로 증폭하게 하는 포르노가 유행하며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탐식을 조장하고, 늘씬하고 예쁘게 성형한 모델들이 외모가 중요하지 않고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위선과 허영으로 왜곡된 욕망의 환경에 놓여있다.


신자들도 이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여 이에 편승한다. 그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는 이런 신자의 삶의 궁극적이고 거룩한 욕구인 하나님 사랑의 회복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