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예술로서의 예배와 신학적 응답

예배의 미래

저자명 이강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by 김돈영 목사(BASE성경교육원) /  작성일 2020-05-04

본문

교회와 예배를 생각하는 시간,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모두가 힘들어하는 시간이지만,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변하게 했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는 예수 안에 있는 거룩한 성도,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의 신앙은 그렇지 못했다. 이 시기를 통하여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저자인 이강혁 목사는 예배의 본질을 인문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지식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우리가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배의 미래’는 교회의 예배와 현실을 고민하며 가슴앓이해 온 저자의 마음이 가득 담긴 책이다. 저자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오직 주만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시편 51편’ 등 수많은 복음성가를 만들고 불렀던 ‘좋은씨앗’의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신앙의 깊은 내용을 서정적이고 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듯 불렀던 곡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고, 교회에서도 불리고 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사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예배와 교회에 대한 깊은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학문적인 연구와 고민,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성경의 틀 안에서 써 내려가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 신학자 베르나르(Bernardus)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De diligendo Deo)에서 제시한 ‘네 가지 사랑’을 인용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네 가지 차원의 사랑은 첫째,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 둘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셋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넷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의 사랑은 인간의 본성 안에 내재 된 것이며,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사랑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종교적 인간을 대표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 번째 단계, 곧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상태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말고 다른 목적과 의도가 없는 사랑이다. 필요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빚어가실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통찰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지식적인 부분을 함께 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지식적인 것이 함께할 때 온전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강의 ‘놀이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에서 저자가 설명한 사랑에 대해 우리의 예배를 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네 가지 사랑’에서 나 자신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과 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머물러 있기에 습관적인 예배와 찬양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하게 한다. 사랑의 목적이 나에게 있는 우리의 마음과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 ‘하나님을 위함’에 있지 않는다면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베르나르를 인용한 세 번째 사랑,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묵상하게 된다. 우리가 판단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억지로 맞추려고 했던 어리석은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분을 닮아가려는 결단과 노력은 하지 않은 채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살아온 경험과 판단만 앞세운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닮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한 욕망을 보이는 것이다.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실제로는 나를 위해서만 사는 모습을 저자는 언급하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 이강혁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안타깝게도 베르나르가 말한 첫 번째 사랑의 모습이 현재 우리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사랑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구와 필요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한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그러한 종류의 사랑을 Lust(정욕)라고 표현한다. 반면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의 사랑을 Love라고 한다.” 그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랑의 모습으로 생활하는 이는 정욕을 추구하며,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습관처럼 드나들었던 예배당에서의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는 때이다. 이제는 예배의 본질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진심으로 예배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면 말이다. 모이는 예배에서 흩어지는 예배를 고민하는 세상을 살며, ‘예배의 미래’가 안겨주는 본질적인 고민을 해보면 좋겠다. 진정한 예배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의 모습을 생각하고 결단해야 하는 요즘, 좋은 친구와 같은 한 권의 책을 통하여 풍성한 은혜를 누리면 좋겠다.('와플터치' 5-6월호와 함께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