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저자명 Reinhold Nieb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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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신동수 목사(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  작성일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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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세상에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사람들이 넘쳐나면 도덕적인 사회 혹은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낭만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 인간과 사회이해에 뼛속까지 서늘해지도록 찬물을 끼얹은 분이 계시니 바로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목사이다.

 

1932년 판 그의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그는 종교학과 윤리학의 놀이터에 원자폭탄을 던졌다. 이것은 그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던 신학적 스승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 1920년 대 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원자폭탄이라던 비유를 빌려 본 것이다. 니이버의 사회 윤리는 그 치열한 현실주의와 변증법적 논리로 1930년 이후 미국의 종교, 윤리학계를 휘몰아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이버 목사는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이며, 실천신학자이다. 1971년 서거하기까지 ‘기독교와 위기’의 주필로서 1920년대 이후 미국의 자기만족적 낙관주의에 철퇴를 가하며,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과 그 심각성이 끼치는 사회적, 국제적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현실적으로 제시하고자 애썼던 인물이다.

 

니이버의 테제는 간명하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도덕적인 존재가 될 수 있으나 일단 집단과 사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사회의 비도덕성을 묵인하고 강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니이버에 의하면 한 사회 집단의 윤리성은 그 구성원 각자의 도덕성에 의해 유지되지 않고 유지될 수도 없다. 오히려 개인적 도덕성은 한 사회 집단이 추구하는 집단 정의의 논리나 권력 및 강제의 필요에 의해 너무도 쉽게 매몰되고, 결국, 도덕적 개인의 존재가 비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특별히 종교적 신념으로 도덕적 삶을 영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니이버의 분석을 살펴보라.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에 기반한 도덕적 삶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은 도덕적 삶을 가능케 하고 많은 갈등과 분쟁을 사라지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결국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과연 신앙을 가진 개인이 어느 사회집단에 소속이 되어있을 때에도 동일하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니이버는 종교인이 가지는 네 가지 도덕적 인자를 언급한다: ‘금욕주의,’ ‘사랑,’ ‘자기성찰,’ ‘소망’이 그것이다. 금욕주의는 개인적 자아와 자기유익을 부인함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평화를 도모케 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유익에 집중하게 하고, 자기성찰은 자신 안에 있는 이기적 욕구를 발견하고 억제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대한 소망은 현실적 고통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인내와 변혁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에 기반을 둔 도덕성은 그 대상이 개인의 영역에 머무를 때에 큰 효과가 있지만,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 발전하면 도리어 강한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신앙의 핵심은 절대자 앞에 선 개인인데, 개인이 사회집단 안에 소속될 때 개인의 신앙은 오히려 ‘절대화’(absolutizing)의 과정을 밟게 되어 갈등과 반목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 사회 안에 있는 개인의 관심과 이익을 대변하고 강화하고 투쟁케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착하고 도덕적인 신앙인 일 수 있지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서로 악수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다른 가치와 신념과 행동양식을 가진 그룹에 속해있을 때, 무슬림과 가톨릭, 가톨릭과 개신교, 개혁파와 루터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한국인과 일본인, 민주당과 한나라당, 그들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게 된다.

 

그의 ‘비판적 기독교 사회윤리’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내가 잘하면 되지’ 혹은 ‘내가 도덕적이면 사회도 도덕적이 되겠지’ 하는 낙관적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 우리는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만나면 ‘도덕적’인 신자들을 수많이 보아왔지만, 그들이 어느 교회나, 단체나, 정당이나, 심지어 어느 지역에 속한 후에는 그들 또한 너무도 쉽게 비윤리적 행태, 즉 내 편 봐주기, 상대편 무조건 비난하기 등에 빠져 버리는 것을 더 많이 목격하게 되지 않는가?

 

사실, 니이버는 이 책에서 완전히 도덕적인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다만, 현실적 기독교 윤리의 최선은 그 개인적 도덕성과 사회집단의 비도덕성의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 그리고 강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개인의 신앙과 도덕성은 그 한계가 있음을 니이버의 고언을 통해 새겨 들어야 하겠다. 혹, 내가 속한 그룹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비도덕성에 어느새 눈감아주고 동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는 우리 교회가 잘못하고 있다고 보면서도, 그 교회의 일원으로서는 오히려 교회의 비리와 탈선을 방조한다던지.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교회가 세워주었으니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최선을 다하겠다든지. 개인적으로는 다른 인간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대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서슬퍼런 비방을 꺼리낌 없이 한다던지.

 

이제는 집단적 자기성찰(introspection)과 집단적 정의를 세우기 위한 체계와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성경의 하나님은 개인에게 뿐 아니라 민족, 혹은 공동체와 교회 전체를 향해 회개의 메시지를 주고 계심을 기억하라. 우리는 결코 내가 속한 모임과 사회와 국가에 존재하는 비도덕성을 안이한 자세로 바라보면 안되겠다. 도덕성을 갖춘 집단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비도덕적인 집단을 제어하고 심지어 퇴출시키는 체제. 이것이 도덕적인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행할 수 있는 기독교 사회 윤리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