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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 지으신 이 세상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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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Marshall Segal  /  작성일 202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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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Grant Ritchie on Unsplash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영원히 소유하고 계신 분 같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나이가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보다 젊으신 게 아닐까?

It may be that he has the eternal appetite of infancy; for we have sinned and grown old, and our father is younger than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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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어떤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하며 깊고도 부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잠시나마 움직일 수 없었던 적이 있는가?


바쁜 삶 중에 그렇게 멈추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피조계를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메시지를 계속 외면한 채 살아간다. 기적으로 가득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헤드폰을 낀 채로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동차, 스마트폰, 팟캐스트, 그리고 유튜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혹(fascination)과 경이로움(wonder) 같은 것에는 이제 관심을 주지 않고,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물려 줄 요량으로 그것들은 서랍 속 깊숙이 처박아 놓았다.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들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내면이 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숙하신 분이다. 매일 아침 태양에게 같은 일을 시키시고 매일 밤 달에게 같은 일을 명하시니 말이다. 데이지꽃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당연히 그래야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데이지꽃을 하나하나 만드시면서도 결코 싫증을 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영원히 소유하고 계신 분 같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나이가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보다 젊으신 게 아닐까? 자연에서 일어나는 반복은 단순한 재발이 아니다. 연주회에서 보는 앵콜(encore) 같은 것이다”(‘Orthodoxy,’ 58쪽).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만드신 것들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신다(창 1:31)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성인인 우리들은 시큰둥해지고, 주의가 산만해지고, 또 너무 바빠진 것 같다.


경이로움이 사라진 일상


우리 일상이 얼마나 많이 인공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라.


집 안을 보면, 우리가 자는 침대부터 욕실, 식탁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동차와 사무실 그리고 책상,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TV까지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내 자동차까지 걸어가거나 복도 끝에 있는 창문까지 걷는 것 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하고 놀라운 세상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지낸다. 특히 도시 환경에서는 우리가 하루 중 접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창의력과 지식은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부끄럽게 된다. ‘누가 과연 이런 나무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집 나무는 비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우리 집 앞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보면 더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해 우리 집 나무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멈춰 서서 우리 나무를 본다면, ‘정말로‘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하나님으로 가득한‘ 나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멈춰 서서 그 나무를 본다면 말이다.  


숲과 나무를 그리며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계에 ‘분명히’ 편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밤하늘과 아름다운 해돋이, 파도가 치는 바다와 평화로운 초원, 퓨마와 개미탑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무시해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는 경건치 못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신 다른 책들을 놓칠 수 있다. 피조계는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계의 모든 부분들을 전혀 틀림이 없고(infallible), 무오한(inerrant)하며, 충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의 창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듣는 목소리를 사랑한다면, 나무, 거북이, 폭풍, 그리고 오늘 아침 앞마당을 짝지어 걷던 오리 두 마리를 통해 들려오는 동일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출애굽기, 이사야, 마태복음과 로마서에서 읽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바다에서 그를 보고 꽃에서 그의 내음을 맡으며 꿀에서 그분을 맛보고 햇살의 따스함이나 첫 눈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피조계를 통해서도 성경에서만큼 크게 말씀하신다. 물론 피조계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 언어가 우리로 온전히 기댈 수 있을 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피조계에서 하나님을 보려면


로마서 1장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광대하고 섬세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후에 우리를 그가 창조하신 피조계 속으로 보내셨다. 하지만 동시에 로마서 1장은 우리가 발견하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롬 1:17), 우리는 이 세상’만을’ 사랑하게 되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진리를 억누르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버렸던 죄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영광은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죄인들은 이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롬 1:23) 바꾸어 버렸다. 새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 새를 만드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새들의 진짜 아름다움, 진짜 노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이 본다고 착각했던 그 영광은 사실 끔찍한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실체를 오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나락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롬 1:24–25).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피조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 빛이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을 통해’ 비추어졌을 때, 동일한 빛은 해처럼 떠올라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비추기 시작한다. T. M. 모어(T. M. Moore)는 “피조계의 전적이고도 최종적인 목적을 알려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Consider the Lilies,’ 89쪽)라고 말했다.


피조계를 바라볼 때


스티브 드윗(Steve DeWitt)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라고 썼다(‘Eyes Wide Open,’ 116쪽). 파랑새가 부르는 블루스, 펭귄의 어기적거림, 강의 급류와 호수의 잔잔함, 백합 꽃잎,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산사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영원히 예수께 고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으로부터 눈을 ‘떼면’ 피조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을(히 1:2)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기 ‘원할 때’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풀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


다윗왕의 시편을 떠올리며 ‘평범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게 되지 않을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이런 종류의 경외감을 가지려면, 특히 그간 피조계를 피하거나 무시해왔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기억하라. 언제나 시간이 ‘걸린다.’ 다윗은 “주의 하늘 … ‘내가 보오니’”라고 했다. 하지만 피조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평범치 않은 당신의 ‘영원한’ 능력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평균 이상이 아닌 ‘신적인’ 본질이다. 


하늘과 땅이 만날 때


이 땅에서는 우리가 ‘그의 피조계를 통해’ 그를 보고 즐거워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나, 다가올 세상에서는 그리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과 경험을 풍성케 해줄 것이다. 창조된 세계는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우리도’ 피조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던 소경 됨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 영원한 날이 오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의 의미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이다. 일반계시에 대해 우리가 조심스레 가졌던 그 긴장과 조바심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해내고 드러내는 그 기쁨 앞에서 사그러들고 말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타락하여 망가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이지만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안에서 그의 음성 듣기를 연습한다. 조 리그니(Joe Rigney)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히 드러낸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피조계에 대한 깊고 심오하고도 어울리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를 이루어내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The Things of Earth,’ 62족)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더 주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그를 즐거워함이 마땅하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Wonder We Once Had: Unearthing the World God Made

번역: 이정훈

피조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If we want to honor God, thank God, and enjoy God through creation, we won’t have to look hard to find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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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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