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의 한국 선교 동기와 선교 방법
by 옥성득2020-05-28

1888년 내한한 초기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왜 선교사가 되었고, 어떤 선교 동기로 내한했는지, 또 어떤 선교 방법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교회와 선교의 정체성 위기에 대해서 숙고할 때 도움이 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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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mes S. Gale, “Missionary Motive (part),” Gale Papers, Fisher Library Univ. of Toronto.  


일의 선교 동기


게일은 1891년 9월 19일에 쓴 글 ‘선교사의 동기’(Missionary Motive)에서 세 가지 선교 동기를 말한다. 첫째는 야망(ambition)이다. 선교사로서 성공해서 자기 성취, 출세, 권세, 부, 명예를 차지하려는 동기다. 이런 저급하고 이기적 동기로 전진하다가 많은 이들이 암초를 만나 파선했다. 선교사들은 이 성공 야망을 늘 경계해야 한다.


둘째는 고상한 동기인데 곧 인도주의(humanitarianism)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매일 복음 없이 죽어가고, 가난과 무지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동기다. 선교사는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이 “불타는 집에서 구원해 달라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리며 현지에 도착한다. 이교도들에게 서구 교육과 의료 등 ‘문명’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선교사들의 착각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서구 문화보다 더나은 점들이 많고, 그들의 문화가 그들 상황에 더 적합하다. 자족하는 한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한국만큼 좋은 데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불타는 집에서 아우성을 치는 자들이 아니라, 평안한 가운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들의 문명적 필요가 정부나 부를 통해 해소되면 선교사는 떠나야 한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는 인도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선교사는 휴머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다.


셋째는 진정한 동기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고후 5:14). 선교지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와 순종과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기에,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가라”(마태 28:19-20)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가 동기다.


게일의 중생 경험과 선교 동기


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열 장로교회에서 자랐는데, 심판하는 하나님과 지옥의 공포에 떨며 불안하고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가듯이 매일 기쁨 없이 지냈다. 집에서 교회까지 5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서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했는데, 14세가 다 되어 갈 때 형과 함께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설교자가 우울한 종교 때문에 고통받는 소년의 슬픔과 고뇌를 상세히 묘사하며 설교했다. 게일은 자신을 모르는 목사가 전 교인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느끼며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전 회중 앞에 드러내는 설교를 듣는 순간, 갑자기 크고 놀라운 빛이 게일에게 임했다. 그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다. 게일은 영혼의 평화를 맛보며 고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다. 그가 내게 오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 내 영혼아!”라고 그는 속으로 외쳤다. 게일은 이 경험을 평생 생생하게 간직했다. 자신을 사랑하여 찾아오신 예수님 때문에, 그는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녹스신학교에 입학한 후, 2년 간 전도자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서 신학교 학업을 계속하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 바로 14세 때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게일의 선교관과 선교 방법


그가 전할 메시지는 신학도, 교리도, 교파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예수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문명화나 사회사업은 필요한 것이지만, 게일에게 그런 것은 진정한 선교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정치를 할 수 있지만,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를 깊이 이해하고 동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동학 혁명이나 의병 전쟁은 비판했다. 종교의 정치화는 파멸로 보았다.


그는 과격한 개혁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 도와주면서 개종하도록 했으나 1900년 전후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반대했다. 1897년 첫 안식년 휴가 때 미국 알바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내 헤론 부인의 친척들이 유력 인사로 있는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한국 경험을 담은 "Korean Sketches"를 출판했다.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조지워싱턴대학에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총장에게 추천서를 써 주어 그가 좋은 교육자가 되도록 주선했다. 그가 이승만을 신뢰한 이유는 이승만이 감옥에서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에서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비전까지 품게 되었다. 게일의 친구였던 이상재도 감옥에서 요한복음을 읽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중생 체험을 했다. 그 경험이 YMCA 운동, 문화 민족 운동을 하는 동력이 되었다.


게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고 확신했다. 또한 하나님은 한국 역사 속에 일해 오셨다는 한국인 조사들(이창직, 이교승, 이원모)의 말을 수용했다. 하나님은 한글이나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천, 하느님, 상제, 조화옹 등)과 같은 ‘복음의 준비’들을 기적적으로 마련해 놓으셨다. 한국 문화와 전통 종교 안에는 기독교와 만나는 접촉점이 많으며, 고대부터 한국인은 하느님을 믿어 왔다. 따라서 역사와 전통과 기존 종교는 기독교에 이용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서구화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물신숭배, 무신론, 무도덕으로 한국의 좋은 전통, 영성, 예의, 도덕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식민 통치와 서구의 할리우드 문화가 판을 치는 1920년대는 18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무례한 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게일은 한글, 한국어, 한국 문학의 수준 높았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매일 몇 시간씩 한문 문집을 번역하거나, 한국 문인들의 하늘(하나님) 숭배의 역사를 정리하고, 성경을 좋은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천로역정’과 같은 한글 번역 소설로 평민에게 복음을 전했고, 고려와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글로 유학자들과 대화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기독교 사역은 언제나 ‘왜’와 ‘어떻게’를 질문한다. ‘왜’와 ‘어떻게’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 110년 전의 선교 방법이 지금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을 연구하고 그 유산을 계승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화(상황화) 작업이 없으면, 또 팬데믹과 같은 돌발 사태에 교회의 일상이 중단되면, 교회는 표류하고 암초를 만나 신앙이 파선될 수도 있다. 성장과 팽창의 야망으로 달리다가 파선하거나, 인도주의적 사업만 하다가 표류할 수도 있다. 교회가 7일 전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서 친구가 되려는 동기를 가질 때, ‘어떻게’는 그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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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옥성득

옥성득 교수는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거쳐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ThM),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ThD)에서 공부하고, 현재 UCLA 한국기독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대한성서공회사’(전 3권),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국 기독교 형성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