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
by Greg Morse2020-06-12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킹(king)이다. 퀸(queen)이 제아무리 강하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해도 퀸 없이 체스 경기를 이기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킹이 잡히면 경기는 끝난다.


그러므로 체스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경우에서든 킹을 보호하기 위해 계산되고 실행된다. 포온(pawn)은 버릴 수 있고 비숍(bishop)이나 나이트(knight),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성(castling) 역시 무너질 수 있다. 킹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퀸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다. 왕관을 쓴 킹은 부하들 뒤에 숨고 성 안에서 보호받는다. 모든 말은 킹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왕이신데, ‘호빗’(The Hobbit)에 등장하는 소인들(dwarfs)의 군주인 토린 오큰실드(Thorin Oakenshield)에 그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다섯 군대의 전투’(Battle of Five Armies) 확장판에서 사악한 오크(orc)들이 소인들과 요정들(elves)의 군대들을 짓밟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어서 토린은 적장인 아조그(Azog the Defiler)를 죽이는 것, 즉 “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계획을 자기 사촌에게 알려주었을 때 그 사촌은 “토린, 절대 안 돼요. ‘당신은 우리 왕입니다’”라고 외친다. 


이에 토린은 진정한 왕의 품격으로 단호하게 답한다.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 


왕이 앞서 나가신다


오늘날 남성들은 그들의 용맹한 왕이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상응하는 남편, 아버지, 성도, 그리고 시민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왕이신가? 그가 처했던 처절한 상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자들이 둘러싸고 그를 배신한 자가 제사장들과 군인들을 몰고 그와 그의 제자들에게로 왔을 때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요 18:4) 그들 앞에 서셨다. 지옥의 진노와 천국의 공의가 예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따랐으나 곧 그로부터 도망칠 이들 앞에 나아가 그들의 죄가 쏜 포탄 앞에 그 자신을 세우셨다. 대적들에게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라고 하신 후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다(요 18:8).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채찍질, 조롱, 십자가, 하나님의 진노, 버려짐, 피 흘림과 수치를 아시면서도 자기 백성 앞에 나아가 서셨다. 이 왕은 자기 백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신 것이다. 전장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군대 뒤에 몸을 숨기고 짖기만 하는 비겁한 개가 아니었다. 그는 가장 끔찍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앞서 홀로 나아가 싸우고 정복하시는 유다의 사자였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요 13:1) 사랑하셨다.


영광의 왕께서는 역사의 체스판에서 그의 신하들 뒤에 숨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을 포온으로 쓰지 않으셨고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으셨다. 자기 왕관을 지키려 자기 신하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으셨다. 그의 신부가 그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신부의 십자가를 지셨다. 


만일 누군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는 왕이십니다”라고 하거나, 누군가처럼 정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하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 진실된 왕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답하실 것이다. 


옛 문이 활짝 열리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던 사탄의 속삭임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저 다른 이를 위해 죽고자 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셨다. 다른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저 '포온이거나 포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가장 높으신 왕이요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가? 자기 대적들을 살리기 위해 고통의 길을 가기로 ‘그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그리 하셨다. 자신의 신부를 살리기 위해 그 길을 가신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사 53:8) 그가 독사의 머리를 잘라 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쏟아 사망에 이르신 후에(사 53:12) 그의 백성에게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강한 용사시다. 영광의 왕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셔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


우리 왕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신랑은 이런 분이다.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


우리 가정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남편 노릇” 같은 말을 할 때, 이런 왕권, 이런 리더십, 이런 머리됨(headship)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남편 노릇의 핵심에 있는 것은 남성적인 용기와 힘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남편 된 우리는 그저 게으른 태도로 지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안락함을 내려놓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퀸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자기 성(城)이 주는 혼자만의 안락함 속에 틀어박혀 아무 문제, 걱정, 상처도 없이 살며 바로 자기들 눈 앞에서 자기 나이트가 목숨을 잃고 비숍이 죽임을 당하며, 나이트와 비숍이 만들어 놓은 성이 무너지고 결국 퀸마저 희생 당하는 걸 보면서도 그들의 충성심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나 던지는 사람은 수치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왕자는 “용감한 여자를 대적들의 손 안으로 들여보내고 우리는 이렇게 안전한 곳에 머물렀다는 것, 이게 우리의 최악의 수치고 슬픔이야”라고 말했다. 


냉담함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시작한다면, 소위 머리됨과 복종(submission)에 대한 숱한 논쟁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남자는 자기 일을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머리 역할을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쓰셨던 그 면류관, 즉 가시 면류관을 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설계도에 대한 완벽한 변증이 된다.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서 킹으로 창조된 이들이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가족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심지어 강성 페미니스트에게도 영향력을 미쳐 페미니스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깊은 갈망을 일깨우게 한다. 남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면서도 그리스도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오늘날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남녀평등주의자들(egalitarians)의 세력은 곳곳에서 종결을 고하기 시작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eadship Crowned with Thorns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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