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가족, 무엇이 먼저인가?
by 김선일2020-05-16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입니다.” 필자가 수업이나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해 하는 표정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해명을 한다. “제 말은 옛날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다 가족을 뒷전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혈연 가족보다 더 큰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입니다.” 이 정도론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중산층 도시 문화에서 가정 사역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하다. 이는 유교 가족주의 영향도 있지만 험난한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대부분 가족 밖에 없었다. 교회는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원의 매개체도 아니다. 이 사실이 바로 정립되어야 교회는 가족을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된다.       


육신 가족의 위기


피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성경은 일관되게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정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을 금하셨으며 혼인의 신비를 재확인하셨다(마 19:6-9). 사도들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복음을 적용하였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곧 믿음의 증명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었다. 육신의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비하고 각별한 관계 가운데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최근 시대의 풍조 가운데 하나가 혈연 가족의 지위가 흔들리며, 대체 가족들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으로 비판해야 할 점과 수용할 점이 모두 존재한다. 혈연이라는 연결감은 인간의 원초적 감각이다. 자신이 입양 부모였던 작가 낸시 베리어는 ‘원초적 상처’(뿌리의집, 2013)라는 책에서 아기들은 40주 동안 엄마 뱃속에서의 교감을 기억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입양이 되더라도 심리적, 정서적, 영적 단절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9.11 테러가 난 후, 많은 이들의 눈물을 적신 사연들 중에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눈 마지막 사랑의 교신들이 있었다.


그때 생각 깊은 사람들이 의문을 던졌다. ‘왜 인간은 저렇게 가족에 연연하는가?’ 진화론적 과학에 의하면, 그건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려는 태고적 본능에 기인한단다. 약간 허무하지 않은가? 가장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가족의 친밀하고 희생적인 관계가 유전자 복제와 증식의 행동 패턴이라니 말이다. 내게 과학적 가설과 설명을 평가할 전문성은 없다. 그러나 두 개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는 절대적 사랑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적 속성에 근거할 것이다.


가족을 향한 문화전쟁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한 문화 역량이 있다는 점을 누구나 동의한다. 인간은 본능의 패턴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혈연 가족으로 인한 문제들은 너무도 많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인해서 부모가 자녀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친권에 의한 학대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남성 중심의 문화가 결혼 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너무도 큰 피해와 희생을 요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독립된 자기를 찾으려는 욕구가 유행이다. 혼인과 출산도 나의 자유와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비혼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외로움은 동거 등의 방법으로, 출산은 입양이나 시험관 아기로 해결할 수 있다. 유전자의 복제와 전파라는 본능적 욕구가 비생식적, 비혈연적 방법으로 대체 가능해졌다. 이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중시하는 문화에 안성맞춤 아닌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촌스럽게 보인다(이상의 현상에 대해서는 김용섭의 ‘라이프트렌드 2020:느슨한 연대’(부키, 2019) 27-64쪽을 보라).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는 가족 해체의 서사다. 문제는 이러한 내러티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교회와 복음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음모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할까? 물론 이는 문화 전쟁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적과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에 대해서는 분별과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육체의 소욕을 물리쳐야 한다(갈 5:16-17).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비복음적 가족관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였고, 최근에는 자기중심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주의 하에서 여성은 종속적 존재로 차별받아 왔고, 위계주의 하에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 내지 욕구 대리인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5:21-6:9)와 골로새서(3:18-4:1)에서 복음을 가족 관계에 적용하는 지침을 알려준다. 이 지침들은 고대 로마인들의 가족 관계를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 틀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정치학’을 보면 가족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3중 관계로 구성되었다고 보며, 남편과 아버지의 지배권을 정당화한다. 성인 남성만이 성숙하고 권위 있는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의 틀에서 성경은 달리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 3:17),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더이상 지배, 두려움,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경외하며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를 거부한다. 이는 예수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 23:9)고 하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11절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제는 지속될 수 없다. 또한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기중심주의와 어긋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함”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강요' 3권 7장을 시작한다. 복음은 순종과 자기부인을 통한 삶의 행복을 가리킨다.  


일차적 가족으로서의 교회 


‘신자의 어머니’인 교회는 복음을 가르칠 뿐 아니라 복음적 삶의 실체를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신자의 참된 정체성과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IVP, 2019)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차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가족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일차적 부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차적 부르심일 뿐이다. 한국계 크리스천 저널리스트인 헬렌 리(Helen Rhee)는 창의적인 제목의 책 ‘미셔널 맘’(Missional Mom, Moody, 2011)에서, 이러한 소명 개념을 가족에 적용한다. “우리의 아빠, 엄마, 남편, 아내로서의 소명이 먼저가 아니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차적 소명이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순서의 역전은 가족에게 역효과를 주며,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이 우리 인생의 일차적 소명이다. 내가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때의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담은(엡1;23) 본질적, 보편적 교회를 말하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차적 소명의 준거점이다.


예수께서는 가족 됨을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셨다. 혈연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그의 가족이 된다(마12:50, 막3:35).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곳으로서 일차적 가족이다(Rodney Clapp, Families at the Crossroads, IVP, 1994). 종종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꾼다. 가족을 하나님의 목적에서 중심 위치에 놓기도 하며, 가족 친화적인 교회를 매우 건강한 이상적 교회로 여기기도 한다. 복음주의 윤리학자 러셀 무어는 ‘폭풍 속의 가족’(두란노, 2019)에서 “교회는 가족 친화적이거나 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 가족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 그는 더 나아가 가족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단일 뿐이기에, 가족을 더 우선시하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능력도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


교회가 가족이라는 복음

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일차적 가족이라는 사실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첫째, 혈연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자들이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해롭거나 당신을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두운 가족의 전통을 꼭 이어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가족 됨을 반영하는 교회는 불완전한 가족으로부터 고통과 상처를 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회복하는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는 전통적 가정 사역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전통적 가족의 범주가 해체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고 혼자 죽지 않는다. 1인 그리스도인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육신 가족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확대하는 선교적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분도, 1985)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가정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솔선적이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된다. 자기네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예수와 예수의 사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서로서로가 관계를 맺는다.”


가족과 교회는 서로 긴장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적 특성을 반영하고, 가족은 하나님의 더 큰 가족, 하나님 가족의 이야기에 참여함으로 참된 정체성과 사명을 찾는다. 예배와 교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가족과 만나고, 선교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풍성한 가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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