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대면하는 방식과 복음
by 노승수2020-05-12

개혁주의는 항상 율법주의라는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속 교리도 형벌적 대속 교리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했다는 것이 이 교리의 근간이며 받아야 할 이 형벌에는 율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율법 이해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개혁파 교리의 근간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언제라도 율법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복음의 핵심을 전달받은 갈라디아 교회도 쉽게 복음의 정수로부터 벗어나 율법주의에 미혹된 것을 보면 아마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빗겨가기 힘든 함정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신자의 삶을 파고들까?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추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변화시켜서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그럼 이런 종류의 타협은 왜 발생할까?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고 기쁨에 젖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적인 죄에 노출되면서 몇 가지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느낌이 들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자신을 주님이 용서하지 않을 거 같고 그렇게 주님 앞에 서기에 자신이 너무 염치가 없어 보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기 상황을 정당화해 줄 어떤 해석이나 방식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 막 예수를 믿고 감격해하는 십 대 청소년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말씀을 듣고 피 끓는 십대 청소년은 자위행위에 죄책감을 깊이 느끼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자위행위를 하고 밀려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오랜 기간 말 못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예수 믿는 기쁨도 잠시 이 반복되는 죄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합리적인 답들을 인터넷을 뒤지면서 찾기 시작한다. “자위는 해도 괜찮다.” “자위는 죄다.” 등의 조언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중에 더러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자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으로 선택한다. 이것을 답으로 취하고 자위를 정당화하지만 여전히 자위행위 후에 밀려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당황스럽다.


여기서 문제는 자위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그 후에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드는 죄책감은 율법을 의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율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사리 조언한다. 예수를 믿고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참 신자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설교라도 듣는 날에는 내 신자 됨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란 율법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몇 개 깔려 있는데 율법의 죄를 드러낼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 혹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적 부패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런 죄가 드러난 상황에 이것을 예수께 가지고 가기보다 자기 안에 촉발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다. 할례와 같은 의식적 제의를 다 함으로 자기 죄를 덮고 그것을 자기 긍지나 자부심으로 가지고 오는 심리적 태도가 나타난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 심리적 욕구들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이것은 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기부터 있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기제는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명품가방을, 남성들이 좋은 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보며 인정의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명품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면, 마치 내가 뭔가를 해낸 것처럼 내 긍지가 올라가는 것과 같다. 흔히 ‘국뽕’이라는 높은 가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았는데 자기는 뭔가 딱히 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런 높은 가치와의 동일시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율법의 행위를 취함으로 ‘자기 의’를 얻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자기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신칭의라는 근본적 믿음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행동들은 율법을 한갓 의식적 제례로 전락시켜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더 강화시키는 해석을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원래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하며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 통치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율법의 그와 같은 요구를 명백히 드러냄으로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출 때, 우리는 스스로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순종하려고 할 때만 우리가 스스로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과 전적 부패를 자각할 수 있다. 순종이 멈추면 외식이 시작되고 외식은 자기를 성찰케 하는 성령의 조명을 무디게 만든다. 그 결과 외식뿐만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자기 의로 가지고 오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율법이 드러내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인 셈이다.


오히려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수치심은 드러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심각하다고 느낄수록 우리가 더 간절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만든다. 자기 병이 중할수록 더 필사적이 되듯이 율법은 내 죄의 병이 중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는 힘이 내면에 자리 잡아야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내 정당성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대충 통과하려는 자는 모두 ‘자기 의’라는 율법주의나 ‘자기기만’이라는 반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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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승수

노승수 목사는 경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석사학위(MDiv),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핵심감정 시리즈(탐구, 치유, 성화, 공동체)’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