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만드시는 건강한 가정
by 전재훈2020-05-05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 확진자가 4월 27일 기준 300만 명을 넘어섰으며 7퍼센트 이상의 치명률을 보이면서 2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계속 확산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전 세계는 서로의 왕래를 끊어 버렸고 많은 국가에서 사람의 이동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동 제한령은 경제를 마비시켰고 일부 국가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강력한 거리두기 캠페인을 펼치며 가급적 재택근무 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바이러스와는 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하고 말았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 위기로 인해 집에 머무르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주지 못했고 가족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전 세계적으로 가정 폭력 신고가 급증하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나고 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일부 남성들이 스트레스를 아내 폭력으로 푸는 바람에 가정 폭력 신고 전화가 급증했는데, 미국의 경우 두 배, 프랑스와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30퍼센트 이상 증가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개학이 미뤄지면서 육아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고, 부부가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서로의 단점들로 인해 결혼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Make yourself at home.”(집에서처럼 편하게 지내세요)의 의미가 무색한 시대가 되었다.


구약성경 룻기에 보면 나오미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룻 3:1)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지는 내용은 룻의 재혼에 관한 이야기다. 룻은 나오미가 흉년으로 인해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얻은 며느리였다. 하지만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죽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작은 며느리였던 오르바는 친정집으로 돌아갔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모압을 떠나 유대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룻을 아끼던 나오미는 젊은 며느리가 혼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보아스와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고 싶었다. 이것을 나오미는 ‘안식할 곳을 구한다’고 표현한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마노아흐’라는 말은 다윗이 언약궤를 성전에 안치한 일을 두고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대상 6:31) 것이라고 표현했던 말과 같다. 실제로 가정은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나오미가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해주려고 했던 이유는 룻을 ‘복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야타브’를 번역한 이 단어는 룻기 3장에서만 세 번이나 등장하는 데, 7절에서 보아스가 ‘마음이 즐거웠다’고 할 때와 10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가정은 안식할 곳으로서 마음이 즐겁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곳이라는 의미다. 히브리 사람들이 가정을 ‘메누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안식의 터전’이라는 의미로, 가정은 곧 ‘안식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우리는 안식할 곳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도 어렵게 된다. 바울이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자주 남편이나 아내 된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장로나 감독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딛 1:6)이어야 한다거나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딤전 3:4)야 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동양에서도 가정의 중요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고대 중국이 통치이념을 정하지 못하고 춘추 전국 시대를 이뤄 살아갈 때 공자는 유교를 만들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게 했다. 공자의 유교사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 인(仁)이다. 사람 인(人)자에 둘을 의미하는 이(二)를 붙여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인(仁)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과일의 씨’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에서부터 도의 질서를 세워 가고자 했던 공자는 인간의 기본 씨앗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여겼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한 유교는 가정에서의 효(孝)를 이웃에게로 확대하여 예(禮)를 가르쳤고, 또한 국가에 대한 충(忠)을 강조하며 국가의 기본 토대를 완성하게 되었다. 결국 동양에서도 가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셨으나 ‘독생자’라는 아들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본질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인 양 오해받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 중 가장 큰 언어가 바로 ‘독생자’이기에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할 때 ‘전 재산이나 내 생명을 준다’는 말보다 엄청난 표현이 바로 ‘내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들을 준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실 때, ‘혼인 잔치의 신부’나 ‘자녀’, ‘양자’, ‘상속자’라는 가정의 언어를 사용하신 사실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은 이 땅에 가정들이 세워져 하늘의 복을 누리는 참된 안식의 처소가 되길 원하셨다.
 

‘안식할 곳’이 되어 ‘복을 누려야’하는 가정이 코로나 사태를 맞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가정의 위기는 비단 이 시대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였다.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과 하와부터 가정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남자나 해산의 수고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던 여자 모두에게 가정이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은 큰 아들 가인이 작은 아들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고,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은 그 후손들까지도 가까워질 수 없는 원수처럼 되었다. 야곱의 아들들도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이런 예들은 성경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윗이나 솔로몬도 가정이 행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마 10:36)가 된 것은 아닐까?
 

유대 랍비들은 가정이 ‘메누카(안식의 터전)’가 되기 위해서는 ‘헤세드(인애)’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아내를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세 분의 관계는 완벽하게 만족스러웠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게 넘쳐흘렀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부족함 없는 사랑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줄어들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메시아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신실하게 이뤄졌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는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손에 영혼을 의탁하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헤세드’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보여주심으로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벧전 3:1)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고 권면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이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명확한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모두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믿게 하셨다. 어린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자녀들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며, 연약하고 부족하기만 했던 부모님을 온전히 회복된 모습으로 다시 보게 될 날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가정이 위기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김영안 단국대 교수는 2013년에 ‘88세대 행복론’을 다룬 ‘행복저글링’(세빛에듀넷, 2013)을 출판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일, 돈, 관계, 건강, 자아 다섯 개 공의 행복 저글링”이라고 쓰여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은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건강과도 관련되어 있다. 돈이 없으면 서로의 관계가 틀어지고 결국 건강까지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코로나 바이스러가 바로 돈, 관계, 건강의 문제를 모두 뒤흔들어 놓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심각한 폐 손상을 유발하고 기저질환을 가진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뿐만 아니라 호흡기 질환에 속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침이나 고열을 동반하고 비말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를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 고강력 거리두기 캠페인은 경제조차 위험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제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정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정마저 무너지면 인간은 더이상 안식할 곳이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항상 그래오셨듯이 오늘날에도 위태하기만 한 우리 가정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는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를 십자가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는 한줄기 소망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활짝 열어 주셨다. 이것이 가정을 지키고 하늘의 복을 누리며 우리 가정이 살아갈 참된 길이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가정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안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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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