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by 이승구2020-04-21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의 매우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별다른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모호해져 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조차도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그저 모호하게 이해할 뿐이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려고 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현상이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잘 의식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을 때는 몽롱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배도(背道)의 길로 가기도 했다.


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모호한 상태에 계속 있지 않기 위해서, 결국 배도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다(신 6:4; 고전 8: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만난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명백히 밝히고 있다(요 1:1, 14, 18, 3:16, 18, 5:18-25, 10:36, 20:28; 롬 9:5; 고후 4:4; 갈 4:4.; 빌 2:6; 골 1:15; 딤전 3:16; 딛 2:13; 히 1:1-4; 요일 4:9, 5:20 등). 예수님을 그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동시에 참된 신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때,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말씀하셨으니(요 15:26), 성자와는 구별된 성령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성령도 온전한 신성을 가지셨음을 성경이 증언한다(마 28:19; 행 5:3, 4; 롬 8:11, 9:1, 15:19; 고전 2:10, 11, 3:16, 12:11; 고후 13:13; 딤후 3:16; 딛 3:5; 히 9:14). 여기까지 내용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바로 믿기만 하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잘못 생각하면 이단이 된다. 우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이거나 16세기에 시작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19세기에 시작된 성부 단일주의(Unitarianism)와 같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신데 로고스가 그 안에 역사했다고 말하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sm)도 역시 이단이다.


성부, 성자, 성령을 믿되,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삼신론 또한 명백한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명확한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성자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자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심지어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아리우스(Arius)를 따르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도 역시 이단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도 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구약 시대의 성부께서 성육신하신 분이 성자이고, 그가 하늘로 오르면서 다시 오신 분이 성령이라는,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고, 성자가 성령이라는 양태론(Modalism)도 이단이다. 215년경에 리비야와 로마에서도 융성하게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양태론적인 설명을 하는 일이 주변에 많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교수이며, 가정에서는 아버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부이시고, 성자이시고, 성령이시라는 설명이 그런 예이다. 또한, 물과 얼음, 수증기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 같은 분자 구조를 가지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 같은 본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양태론적인 설명이다. 이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면 교회에서 이런 예를 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단적 생각들을 다 배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2)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성부와 성령은 성육신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자만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는 정황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이 한 장면에 이 땅에 계신 성자와 그 위에 임하신 성령, 말씀하시는 성부가 나타나고 있다. 성부가 곧 성자이고, 그가 곧 성령이라고 말하려는 양태론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본질을 지니신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심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


이 삼위(三位)는 합해서 하나가 되시거나(fused), 혼합될 수(mixed together) 있는 것도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영원히 구별되는 존재들(subsistence)이시나, 하나의 동일 본질을 가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하거나,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고 영원히 동등하시다.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그것은 성자가 본질상 성부에게 종속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동등하신 성자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래서 “위격상의 동등하심과 사역상의 순종”이라는 말을 기억해 놓으면 좋다. 여기 참된 겸손이 드러난다.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요구를 하는가? 다음 세 가지를 제대로 해야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누구를 찬양하는가? 이때 아주 명확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물론 계속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모호하게 “하나님, 주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명시하던 이전 시대의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오늘날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찬양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둘째로,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께 기도할 수도 있다. 성자나 성령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그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이다. 항상 기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해야 한다.


셋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요 14:16) 이를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마 28:20) 이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성부께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사는 역동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바른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란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이승구

이승구 교수는 기독교교의학(CHRISTIAN DOGMATICS)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총신대 기독교교육과 졸업, 합동신학대학(MDiv)과 영국 The University of St. Andrews(PhD)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성경신학과 조직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