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변하는 것이다
by R. C. Sproul2020-06-14

이론상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는 바로 이 질문에 담겨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시간과 공간을 “순전한 관념(pure intuitions)”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시간이 물질 및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과 공간(물질과 운동)이 없다면 시간의 경과를 측정할 방법이 없다. 시간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결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다양한 물질로 시간의 경과를 측정해 왔다. 표면 위를 가로지르는 태양 그림자의 움직임을 사용한 해시계, 쏟아지는 모래를 사용한 모래시계, 시계 안에서 작동하는 기어가 원을 따라 움직이는 분침과 시침. 나는 큰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초침의 움직임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시계 속 12라는 숫자를 보면서 초침이 그 숫자를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눈은 또한 아래에 있는 6이라는 숫자를 보고 있는데, 아직까지 분침이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침이 시계 바닥을 쓸고 지나가며 6을 스치는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느낀다. 분침이 그 숫자를 스쳐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 조금 전까지 미래였던 시간이 어느덧 과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종종 시계를 앞에 놓고 이런 실험을 할 때면 나는 시계의 움직임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누군가가 이미 선언했듯이,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피조물 속 모든 것은 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피조물은 다 변한다. 모든 피조물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불변하다. 하나님, 하나님 한 분만이 시간이 주는 이 가차없는 공격을 피해갈 수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측정할 뿐 아니라 연대 및 시대라는 이름을 붙인 일정한 기간도 같이 측정한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현세대를 살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인류 역사의 변환을 목격했고, 그럴 때면 시간이라는 벽 사이에 끼인 우리는 그 벽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끼기도 한다. 흔히들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시간, 그 자체가 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전히  1분은 60초고 1시간은 60분이며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러나 문화는 패턴, 가치,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나는 극적인 문화의 변화를 목격했다. 루즈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서 미국이 처음으로 원자 폭탄을 시험 투하한다는(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전)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이 암살되었을 때, 러시아가 우주로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인류가 달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도 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십 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1960년대의 십 년이다. 당시 미국이 겪은 문화적 무혈 혁명은 너무도 엄청나서 사람들이 그전까지 자연스럽게 여기던 문화를 1960년대 이후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마치 외계인의 문화처럼 생소하게 느낄 정도였다. 60년대의 혁명은 이상주의의 종말을 고했고 성적 혁명을 포함하여 우리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중에서도 결혼의 신성함이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들을 수 있는 깨끗하고 건전한 연설은 점점 드물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에 대한 신성함은 입법적으로 공격 받았고, 도덕적 상대주의는 이제 우리 문화의 표준이 되어 버렸다.


이 도덕적 상대주의와 함께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은 기술 발전도 있었다. 컴퓨터의 등장과 보급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지식이 폭발했고, 사람들은 이제 누구라도 다 어느 정도는 “온라인”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런 상대주의 문화로 인해 약물 중독, 자살, 포르노 중독 같은 사회 문제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도전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교회가 맞은 비극은, 세속 문화가 얼굴을 바꾸면 거기에 따라서 교회도 같이 얼굴을 바꿨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열망에 빠진 교회는 이제 단지 세속적 세상이 내는 소리의 메아리로 전락하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과 “더불어(with it)” 있고 싶은 열망과 이 현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고 싶은 갈망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어떻게 해서라도 극복해야 할 상대성을 가장 열정적으로 도입한 곳이 되고 말았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세와 현실을 다루면서도 변하지 않는 영원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다. 영원과 거룩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유한하고 세속적인 이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교회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한 교회는 언제나 신성함(sanctity)을 추구할지 아니면 신성함을 더럽히는 불경함(profanity)을 추구할지를 놓고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노예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 교회를 필요로 한다. 죽어 가는 죄인의 박수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를 기뻐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필요로 한다. 지금 그런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다.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구속의 사명을 담당하는 교회,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았다. 오 주님, 이런 부르심에 우리의 귀가 닫혀 있다면, 지금 우리를 또 우리가 속한 이 문화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Times, They are a-Changin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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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R. C. Sproul

R. C. 스프로울 박사는 Ligonier Ministries를 설립했으며, 플로리다 주 샌포드 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창립목사로, Roformation Bible College의 초대총장으로 봉직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거룩성’(The Holiness of God)을 비롯하여 백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