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쉐마, 그리고 영광스런 삼위일체
by Scott Redd2020-05-15

흔히 쉐마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4절의 첫 히브리어의 뜻은 “들으라!”다)은 모세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과거의 언약(old covenant)을 설명하는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본문은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다른 이들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마 22:36-40; 막 12:28-34; 눅 10:25-28).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쉐마를 향해 귀를 열어 놓고 신약을 읽는 사람이라면,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 쉐마를 언급하는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바로 이 쉐마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다름 아니라, 그는 신명기가 쉐마를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다”라는 메시지는 삼위일체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를 사용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두 위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성령님까지 이 쉐마의 공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지금 쉐마가 기독교 복음에 의해 쓸모 없게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로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측면까지 고려하여 바로 이 쉐마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쉐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신약 성경에서 쉐마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신학적 읽기와 설명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대제사장 기도(요 17:20-26)의 피날레에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는 그의 백성과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백성의 정체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쉐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1절에서 요약된, 이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에 주목하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삼위일체의 제1위격과 제2위격의 단일성은 실제로 하나됨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인간의 온전함(wholeness)에 대한 근거까지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백성들이 그분 자신과 실질적으로 연합함으로 삼위일체가 누리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성령님의 내주에 의해 이런 연합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됨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이 기도가 말하는 하나됨과 온전하게 됨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 학자인 리차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설명은 이 질문에 도움을 준다. 그는 요한복음이 다루고 있는 ‘하나됨’이라는 주제는 ‘하나’라는 의미 속에 두 가지의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하나’는 고유성 또는 독특성(uniquenes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쉐마의 가르침에서 첫 부분이 바로 여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신 6:4-9).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는 고유하고 독특하다. 그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오로지 홀로 계신 존재다. 하나님의 독창성에 관한 이런 가르침은 신약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쉐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럼 세 위격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일 수 있는가? 보컴은 요한복음 17장 주석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쉐마가 암시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하나’라는 단어 때문에 쉐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신의 독특함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뤄지는 교통에 있다고 예수님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하나됨에 대한 주장, 하나님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로 인한 하나됨의 주장은 초기 유대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Richard Bauckham, ‘Gospel of Glory’ in Richard Hays, ‘Reading Backwards’를 참조하라).


그러나 하나됨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하나는 사물이나 사람의 통일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쉐마의 두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통일된 온전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미인 것 같다. 그들의 마음과 영혼과 힘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다. 보컴은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된 백성의 사례가 구약 성경 속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고 지적한다(사 45:20; 겔 34:23; 37:15-24; 미 2:12; 호 1:11). 그러한 하나됨의 개념은 쿰란과 그 주변의 유대 사막 종파 공동체에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됨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인 예하드(yehad)라고 불렸다(미 2:12). 예하드는 종종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 역시 하나됨 또는 단일성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기도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통일된 공동체가 회복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백성들과의 연합이야말로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현실, 서로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통일됨의 기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일부로서 그의 위치와 또한 그의 백성과의 연합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세 위격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더 나은 일치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모세의 언약보다 더 크고 더 나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대제사장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모세의 쉐마를 역방향(read backwards)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온전함과 사랑에 대한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부르심은 새 언약을 통해서 더 개선되고 더 명확해진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분과 우리의 연합을 이루었고 또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하는 하나됨 속에 참여하게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의 쉐마가 언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이자 또한 우리와 하나된 주님의 성품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성품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우리 주님을 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서 말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고전 12:3),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천명한 목표를 명심해야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2–23).


우리가 사랑의 목표, 즉 텔로스(telos, 헬라어로 ‘목표’를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목표도 삼위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그들의 사랑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를 기도했다. 쉐마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사랑은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우리의 목표는 성령님 안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Jesus, the Shema, and the Glorious Trinity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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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cott Redd

스코트 레드는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구약학 교수이다. 저서로는 ‘The Wholeness Imperativ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