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도 되는가
by Kathryn Butler2020-04-20

난 영화를 추천한 친구를 믿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끔찍한 살인 장면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내 친구를 째려보았다. 이어서 추격 장면이 나왔는데 길에 서 있던 무고한 사람을 난자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영화의 마지막,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은 악당을 펜치로 고문했다.


내 친구는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스크린을 향해 몸까지 기울이며 완전히 영화에 빠져 있었다. 반대로 나는 소파에 파고드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감독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도록 자극적인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여 해설했다. 잔혹함을 엔터테인먼트로 위장한 영화를 보며 복수와 잔혹함 속에서 승자의 통쾌함을 맛보고, 피에 물든 손가락을 흔들면서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제 좀 끄지,” 난 쏘아붙였다.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웃었지만, 이내 농담이 아닌 걸 알고는 친구의 눈이 커졌다.


“아니, 외상 수술(trauma surgeon)을 하는 사람이 왜 그래? 이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더 끔찍한 걸 다 봤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현실에서 이보다 끔찍한 것을 더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처럼 끔찍한 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 사실 피가 튀고 내장이 보이는 이런 영화는 비극이 가져다주는 진짜 후유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슬픔에 젖은 부인과 고아가 된 아들들에게 칼날과 파편, 그리고 박살 난 자동차 유리창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절대로 상처의 흔적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폭발로 인해 엉망이 된 피부 조직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수술도 표현하지 못한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흉터가 어떻게 사형 선고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흘린 피를 깨끗하게 닦은 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을 외상 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내내 보았다. 생명을 앗아가는 방아쇠의 위력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


“나는 저런 거 많이 봤어, 그러니까 제발 좀 꺼 줘” 나는 말했다.


폭력적인 미디어는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가?


폭력적인 미디어에 대한 논쟁은 반세기 이상 과학계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10년 전,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부모와 소아과 의사에게 경고하기 위해 폭력적인 미디어와 공격적인 사고 사이의 연관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로 이뤄진 연구는 그 성명서의 내용을 더 보강했는데, 폭력적인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 노출된 젊은이들 속에 잠재한 분노, 실제 폭력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공감 능력 약화 등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 주제는 아직도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AAP와 같은 조직이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공포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연구는 미디어 노출이 실제로 삶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실험실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볼 때 생긴 생각과 느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잔인하고 참혹한 영화(gory movies)가 공격적인 생각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의론자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는 상황의 경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논쟁은 공공 부문으로 흘러 들어간다. 작년에 있었던 유명한 총격 사건이 전국적으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인들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잠재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은 신속하고도 격렬했다. 인터넷에는 그런 비난에 대항하는 네티즌으로 넘쳐났다. 총격 사건 이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서 공포 영화 ‘The Hunt’의 개봉을 취소했다. 몇 달 후, 영화 ‘조커’(Joker)는 잠재적으로 주인공을 모방한 살인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쟁이 가열될수록 양측에서는 감정의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엔터테인먼트가 사랑에 해를 입힐 때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크린에서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때, 우리는 봐야 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야 할까?


폭력적인 미디어와 실제 끔찍한 행동을 연결하는 데이터는 없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증거는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한다.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폭력적인 미디어는 사람이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타인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 덜 민감하게 만든다.” 비록 영화 속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당장 나가서 폭력을 저지르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이 우리의 공감 능력을 둔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런 사실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내적 가치와 존엄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죄의 짐을 지고 도움을 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요 13:34–35).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1 3:16-17).


화면 속 무의미한 폭력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는 곤경을 외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컴퓨터 그래픽이 주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의 열린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면이 꺼진 후에 느끼는 고통


미디어 속의 모든 폭력이 다 타락한 건 아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폭력이 쓰일 때, 영화적 사실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자신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몸과 영혼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우리를 더 깊은 묵상으로 이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구세주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무모함이 아니라 정직하고 예민한 태도로 폭력에 접근할 때, 사실적인 영화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을 정죄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의 묘사를 추구한다. 많은 영화는 폭력을 마치 금단의 열매처럼, 즉 고삐 풀린 죄가 아닌 화려하고 멋있게 묘사한다. 그래픽 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살과 사방에 튀는 피를 묘사하지만, 그러한 폭력적인 장면이 내면에 남기는 영향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응급실의 임상의가 알고 있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폭력은 아이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또 부모가 없는 고아로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 순간적으로 쉽게 당기는 방아쇠는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슬픔을 가져온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는 사랑하고, 꿈꾸고, 희망에 찬 수많은 생명을 사라지게 한다. 그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 아니라 몇 세대를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은 결코 흥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악이 남긴 표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몸은 찢어지고, 살과 피로 물든 사탄의 솜씨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영화가 되었든, 비디오 게임이 되었든, 또는 인쇄물이 되었든 어떤 미디어를 봐야 할 것인지 그 가이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아야 한다. 분별에 관한 실로 아름다운 주석을 통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폭력적인 영화가 참되며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런 영화가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또 칭찬받을 만한 마음을 일깨우는가? 우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지 않은가?


폭력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길로 이끄는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키워주는가? 대답이 “그렇다”라고 한다면,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영화를 시청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대답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근거로 해서 화면을 끄도록 하라. 대신 참되고 사랑스러운 것,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통하여 눈을 즐겁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Let Not Violence Entertain You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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