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죽음? 어리석은 죽음?
by 김돈영2020-03-21

웃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말 억울하겠다, 궤가 떨어질 것 같아서 잡은 것뿐인데 죽다니 말이야”
“무슨 소리야! 정말 어리석은 거지, 그걸 왜 만져, 만졌으니까 죽는 거지”

웃사를 아는가? 억울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바로 그 ‘웃사’ 말이다.


첫 번째 왕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된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7년 6개월 동안 다스리던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다. 다윗은 바알레유다(가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로 했다. 새 수레를 준비하고, 악기 연주할 사람도 모였다. 드디어 수레에 실은 하나님의 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여호와를 찬양한다.


웃사는 아효와 함께 궤를 실은 수레 곁에서 가고 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가 휘청한다. 수레가 흔들리면서 바닥으로 궤가 떨어질 것 같다. 웃사는 재빠르게 궤를 잡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죽었다. 외부의 요인으로 죽은 게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였다. 웃사는 궤 곁에 쓰러져 그렇게 죽었다.


웃사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나님의 심판이니 알 권리 공익의 차원에서 웃사의 죄를 낱낱이 파헤쳐야 할까? ‘불쌍하다’는 사람과 ‘억울하다’는 사람으로 나누어서 무엇이 옳은지 확인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자리를 피해야 할까?


웃사가 죽은 이유는 분명하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수기 4장 15절)


웃사는 몰랐다. 하나님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손으로 만졌다. 우리는 웃사의 잘못이 분명하기에 그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보면 되는가? 그렇게 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다. 그 찜찜한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레위인은 무엇을 했는가?


웃사가 말씀을 몰랐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말씀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레위인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직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않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신명기 33장 10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다. 각 지파에서 제공한 성읍에 거주하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말씀에 무지하여 사망사고가 일어났다면 레위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여 나라가 혼탁해졌던 경험이 있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을뿐더러 개인의 제사장으로 고용되고 심지어 첩을 두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했던 과거가 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장 25절)라고 말할 만큼 타락한 사사시대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등한시 한 것이다.


다윗은 어떠했나?


이스라엘의 왕은 대리 통치자다. 왕이지만 제한 된 왕권이다. 자신의 신념과 소신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 위의 진정한 통치자, 하나님께 권한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왕이다. 그가 할 일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그 뜻을 온전하게 전달하고, 대신하여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명기 17장 18~19절)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는 일에 다윗이 함께했다. 그가 법궤 운반의 모든 것을 기획했다면, 자신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서 몰랐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의 직무가 바로 율법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몰랐다면 왕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더 큰 일이다.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사람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웃사는 피해자인가?


레위인과 왕 모두 직무유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웃사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다. 말씀을 벗어나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렇다면 웃사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 피해자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출애굽기 19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모든 나라의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레위와 같은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라고 말이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 6장 6~7절)


웃사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는 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레위족속이 아니라 다른 족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말씀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단절되었는지는, 어떻게 하다가 단절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절되었고 더 이상 말씀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웃사의 죽음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 총체적 문제다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왕과 레위, 웃사 그리고 다른 백성들도 모두 당사자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을 아는 이가 있었다면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웃사의 잘못을 심판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전체,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신 것이다.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웃사의 죽음에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한다. 웃사 주변에 서서 불쌍하다고 억울하겠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생각은 버려야 한다.


2. 변해야 한다


누워있는 웃사를 바라보며 깨달아야 한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왕이 깨달아야 한다. 그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라. 레위인들은 정신 차리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곧 성도로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라.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듯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면 변해야 한다. 잘못 채운 단추를 풀어야 한다. 번거롭고 귀찮더라도 풀어헤쳐야만 제대로 채울 수 있다. 처음부터 잘 채워나가도록 변해야 한다.


3. 함께 울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충격은 오롯이 웃사의 가족 몫이다. 우리의 문제이고, 우리의 죄라고 말하지만 웃사의 가족에게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이 더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추측하지 마라. 판단하지 마라. 마치 하나님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냥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는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갑작스러운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웃사의 가족이다. 그 가족과 슬픔을 나누는 것이다. 진심으로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이다.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습도 이와 같다. 요즈음 ‘코로나19’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한 시선, 우후죽순 생겨나서 손조차 쓸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문제이고, 그들의 잘못이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려고 애써야 한다. 말씀을 따라 변해야 한다.


그리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힘이 닿는 대로 안타까운 마음,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려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갈 수 있고, 후방에서 물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응원하고, 격려하며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을 전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이웃들,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이어야 한다. 참으로 복음을 안다면, 복음을 참으로 전한다면 말로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를 향한 그 사랑에 기초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면, 그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것이 심판인지 아닌지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이 없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시선은 사랑에 기초한 안타까움이고, 애처로움이며 슬픔이어야 한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아픔을 나누고,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며, 먼저 믿은 사람의 행동인 것이다. 복음을 행동으로 전하는 것이다.


믿음이 약하거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그의 부족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 뜻을 이루어가시고 완성해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단지 함께 아파할 뿐이다. 그 아픔을 보듬어주고, 더 큰 상처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웃사를 바라보면서 믿음 없는 사람에 대한 심판, 말씀에 무지한 사람을 향한 경고, 혹은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된다. 사건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각자에게 주시는 대로 깨닫고 행하는 것이다. 만일 당사자가 아닌 관람객의 마음을 갖는다면 그 순간 웃사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를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파야 한다. 아파해야 한다.

아니, 아파해야만 한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극을 앞에 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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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돈영

김돈영 목사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CTS라디오조이 ‘찬양의자리’ 진행자와 BASE성경교육원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직장선교아카데미’와 ‘군세움프로젝트’를 통해 성경을 강의하며, 다양한 집필 활동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