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by 안환균2018-11-0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마땅히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진정한 믿음의 첫 번째 증거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학교에 가고, 병을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에 간다. 그렇게 해서 함께 어울려 공부하거나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거기에 있는 교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때 소정의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교회공동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통로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진실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한 요청에도 기꺼이 응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분을 온전히 믿기 싫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라는 사람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교회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내 삶에서 더 중대한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 그분을 만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그런 만큼 그에게는 적어도 교회에 나가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야 상식적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구도의 과정에서나 만난 이후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결정적인 축복의 통로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출 수 있다면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 낮거나 좁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교하고도 복잡한 창조물들의 신비를 통해 지성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의식하고도 그분의 간섭을 받기 싫어 별 생각 없이 그냥 무신론자로 남으려 한다. 신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교회 참여만은 꺼리는 이유 역시 간섭받는 삶이 싫어서이다. 그러나 신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기만 하고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로 받아들이며 교제해나가지는 않겠다는 태도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잃었던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한 개개인이 곧 교회이며, 동시에 그 개인들의 모임 또한 교회이다.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 받은 개인들이 서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 공동체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이뤄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완성된다. 하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는 나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교회는 왜 나가냐?”라는 물음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오해한 탓으로 갖게 된 의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이러한 건실한 공동체성을 올바로 경험할 때 사회의 각 영역에 나가서도 올바르고 건강한 공동체성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신자들을 지체로 삼은 한 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18).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이러한 교회공동체에 한 지체로 참여하는 일은 각 신자가 경험한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핵심 잣대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동일하게 그 사랑을 아는 다른 신자들과 사귀고 싶어진다. 공동체가 아쉽지 않다면 신앙의 진정성을 재점검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더구나 교회가 한 몸이라면 그 몸에서 떨어져나간 손은 손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만큼 한 유기체의 한 지체인 신자가 생명력을 공급받으려면 그 본래의 몸체에 한데 붙어 있어야 한다. 여러 은사와 기질을 가진 다양한 지체들이 교회공동체로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고 용납하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도 신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를 한 유기체로 고안하신 하나님의 배려는 사랑이지 짐이나 부담이 아니다.


천국에 가기는 각 개인이 가지만 천국을 이루기는 혼자선 불가능하다. 천국에 갈 사람은 먼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의 방식을 훈련받아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신앙생활은 목적지를 잃은 방랑생활과도 같다. 교회에 참여하기가 번거롭고 싫다고 해서 천국 훈련을 포기할 순 없다. 물론 무턱대고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영적 영양분을 흡수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매일의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데로까지 나아가야 성숙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인격적인 관계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이 없이는 올바로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풍성하게 맛보게 해주는,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지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로 부여된 예배와 교제,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는 모두 공동체적인 활동을 전제로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4-25).


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는 교회라는 구심점이 각 지체들이 각자의 일상 가운데로 흩어져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두세 사람은 증인의 최소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증인공동체인 교회를 무시한 개인적인 신앙생활만으로는 세상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개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이유이다.


더구나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림 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 또한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은 교회에 소속된 지체가 죄를 범하면 그를 판단할 최종권위를 교회가 갖는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한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공동체는 늘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예배 공동체였다.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각자의 골방과 일상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는 더욱 귀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신앙 생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성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의 연합을 원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믿음 이후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올바로 강조되지 않으면 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을 따라 “교회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뛰쳐나가도 말릴 도리가 없다.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사원’ 같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관련하여 교회는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이스라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신 에덴동산이 아브라함의 제단으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으로, 그리고 교회공동체로 발전했다. 이것이 장차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교회는 태생 자체가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당신이 모태에서, 아니 태초에 에덴동산의 흙으로 창조된 이야기와 연결되고, 현재 당신의 삶과 죽음에 속속들이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존재의 완성과도 깊이 관련된 존재의 정점이기도 하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전해져 온 각 나라와 민족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 또한 예수님이 성경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진 선교의 역사이다. 교회를 통해 이 명백한 인류역사의 대로에서 이탈하지 않는 참된 믿음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예수님의 몸 된 공동체, 즉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얻기 위해 온 우주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주장해오셨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 인류 역사라는 대하드라마 역시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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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환균

안환균 목사는 미국 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를 받고, 현재 그말씀교회 담임목사, 변증전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사랑의교회 부목사로도 섬겼다. 대표 저서로 '당신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