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묵상하는 하나님 사랑
by 전재훈2020-03-14

인간의 삶을 관찰하는 인문학은 세 개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둘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셋째,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간의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직립보행하고 사회적인 행동성향으로 보아 ‘나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출생과 가족관계와 하는 일을 통해 나를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하는지 깊이 고찰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는 역사와 철학과 경제와 종교를 두루 거치며 살펴보아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인간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시간은 인간에게 삶을 제공했고 그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는 환경도 변하고 몸도 변하고 그와 더불어 생각과 가치관도 변하기 때문에 고정된 시각으로 내 삶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과거의 내 삶을 돌아보고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시간들을 통해 오늘의 나를 규정지으려 해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오늘의 나를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고정시켜 주지 않는다. 


인간의 생애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역사도 변하고 있기에 삶의 모습도 변하고, 정치적 상황이나 국제적 상황도 변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 삶을 규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지나온 역사는 삶의 참고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용법이 되어 주지는 않는다. 각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내가 살아가는 문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삶은 다양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다. 같은 공간, 같은 부모, 비슷한 DNA를 가진 쌍둥이라도 그 둘의 삶은 서로 다르게 펼쳐진다. 5천만 명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의 삶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몇 개의 특징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규정해서 여러 개의 카테고리에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5천만 명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곳에는 서로 다른 5천만 개의 삶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볼 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미래를 뭉뚱그려 헤아려 볼 수만 있다. 그렇게 내다 본 미래도 막상 다가가 보면 무수히 많은 예측들 가운데 하나를 살아가게 되거나 실상은 전혀 다른 미래를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미래는 오직 인간의 죽음뿐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죽음을 미룰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진리가 되었다. 누군가는 죽음을 미루는 방법에 온 생을 다 바쳐야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문학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범죄한 죄인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용서하셨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여전히 변화하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을 붙들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영원히 누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고난이라는 문제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고난의 큰 파도를 넘으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더욱 가까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안에서 더 큰 만족을 누리기도 한다. 고난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혹은 더 가까워지게 하는 고난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고난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점을 출발선으로 삼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고 이끄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내가 기대하는 방식의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야 할 뿐 사랑 자체가 의심되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 주시는 고통을 감수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도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출 12:43-45)


장자의 죽음이라는 큰 재앙을 피하는 길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에 바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양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유월절 양식을 모두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방 사람이나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을 수 없었다. 다만 돈으로 산 종만이 할례를 받은 후에 그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놀라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 언제까지나 종으로 살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유월절 규례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후에는 그들에게도 종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집에 거류인과 타국 품꾼도 기거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이었다. 


돈으로 산 종과 타국 품꾼은 같은 집에 살고 같은 일을 하게 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다른 집에 종으로 팔려온 사람과 자신의 노동력을 대가로 돈을 받는 품꾼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르다. 유월절이 다가오면 종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품꾼은 그런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 또한 할례 받은 종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맛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고 일해야 하지만 품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었다. 품꾼은 자신의 집안이 저 종만큼 가난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고, 종은 너무나 가난한 탓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까지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것에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월절의 의미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종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유월절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상징하고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돈으로 산 종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구속된 존재라는 사실까지 늘 기억하지는 않는다. 특히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에는 더더욱 잊어버리기 쉽다.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 종으로 팔려와 할례를 받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하는 처지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원망의 조건이 되지만, 이 모든 것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믿을 때는 엄청난 감사의 조건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돈 받고 팔려온 종인가 아니면 구속 받은 죄인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원망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감사로 찬양하며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영원히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살아갈 자녀가 될 것인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여러 경험들이 빚어낸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과, 먹고 자고 입는 것의 수준들로 평가될 사람들도 아니다. 오늘의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자녀 삼은 가장 존귀한 자임을 믿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의 나의 삶을 원망과 불평으로 얼룩지게 하기보다 감사와 찬양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늘의 만찬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은 비록 무교병과 쓴 나물로 한 끼의 식사를 해야 하는 돈 받고 팔려온 종의 신세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지금 어떤 곳에서 무엇 때문에 울고 있을지 몰라도 당신은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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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