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에서 만나는 네 가지 거짓말
by Kaitlin Miller2021-06-11

대학 환경과 교실은 기독교인에게 위험한 곳이다. 어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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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진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일반 대학을 다녔는데, 지금은 그때의 경험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당시 접한 사상들과 사람들은 내게 정보를 주었고 또 도전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오늘날까지도 매일 확신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나를 단련시켰다.  


교회에서 받은 훌륭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한 해 한 해가 지남에 따라 나는 인간적인 교리가 가진 교활함과 교묘함의 강하고도 미묘한 설득력에 점점 더 빠지기도 했다(엡 4:14).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반대하는 다양한 논쟁과 의견은 바람처럼(고후 10:5) 교실, 캠퍼스, 학교 간행물, 학생 단체 및 복도에서의 대화를 휩쓸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조차 제대로 준비되지 않는다면 이런 설득력 있는 거짓말에 얼마든지 좌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오직 변하지 않는 진리를 향해서만 준비한다면, 그들의 거짓말은 도리어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할 것이다(마 5:13-14).   


캠퍼스에서 싸운 네 가지 거짓말


대학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려 하거나 그들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밀어넣지 못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대학 환경과 교실은 기독교인에게 위험한 곳이다. 어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더 그렇다. 이런 위험에 닥치더라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캠퍼스에서 만나는 다음 네 가지 거짓말을 잘 숙지해햐 한다. 


1. 믿음은 종교에만 필요하다


영어 또는 과학 과목 첫 번째 시간부터 교수들은 종종 믿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는, 분열적인 가정 하에 학기 전체 커리큘럼을 짠다. 통상적으로 이런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연주의나 무신론의 대척점에 둔다. 마치 자연주의와 무신론은 그 자체로 그 안에 다양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이론들도 우주의 시작, 삶의 의미, 경이감의 체험, 인간 존엄성의 근원 그리고 선과 악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도덕 논리 등에 대한 아주 취약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과학적인 관찰만으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그들의 많은 주장이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들 중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단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교수를 만난 적이 없다. 누구나 다 원자, 바람, 자력, 중력 그리고 팽창하는 은하계와 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인정한다. 우리는 힘이 일으키는 영향을 관찰함으로 또 그 원인을 관찰함으로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롬 1:19-20). 게다가 모든 교수는 성경보다 훨씬 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에 근거해서도 얼마든지 과거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이다. 우리가 증거에 근거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증거에 근거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이다. 단지 경험적인 증거에만 의존하는가 아니면 기독교가 바탕을 두는 것처럼 역사적, 논리적, 도덕적 그리고 철학적 증거를 통합한 내용을 근거로 하는가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논할 때 생기는 문제는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듯이(롬 1:18-19), 죄성을 바탕으로 그 증거를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성향이다. 


2.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종류가 되었든지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로 없다’는 이런 식의 일방적인 주장 자체가 절대적 진리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특정 관점으로 치우치는 순간 그 관점은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족, 문화, 그리고 경험이 주는 영향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 믿음에 치우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향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믿게 한다면, 그 사실 때문에 지구가 덜 둥근걸까? 그런 환경적인 영향을 받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은 친구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이유를 교실에서 말한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이 되는 걸까?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드러낸 진리와 대항하는 모든 주장이 믿을만한지 테스트해야 한다(살전 5:21; 행 17:11).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가 어떤 특정한 믿음에 더 치우쳐져 있기에 그 믿음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거짓말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이 선입관을 주어 어떤 특정한 믿음을 갖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 경험에만 의존하는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다(요 14:6). 진리의 사람은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믿는다고 예수님이 말했다(요 18:37).  


3. 네 자신만의 진리를 따르라


어떤 이들은 신앙의 필요성과 절대 진리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 속에서 그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대학 캠퍼스의 많은 학생 그룹과 각종 운동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한 추구이자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이 “당신만의 진리를 살아내는 것”, 즉 “당신 스스로 하고” 또 “당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육체가 갈망하는 대상에 따라서 당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도덕 여부를 판단하며 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수 세기 동안 인간에게 미끼로 던진 유혹을 교묘하게 숨겨왔다. 호색과 욕정, 그리고 불의에 빠짐으로 우리의 마음은 무감각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엡 4:18-19; 롬 1:24-25). 하나님이 정한 경계 안에서 그 부요함을 누리며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경계를 숨 막히게 하는 것으로 바라보라는 속임수에 빠짐으로써 우리는 영혼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을 떠나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 계좌가 바닥을 드러낼 때,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표준이 절망을 가져다줄 때, 세상 명성 뒤에서 외로움을 느낄 때, 그리고 밤새도록 이어진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찬란한 아침을 맞을 때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음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진리가 가져다 주는 굳건한 반석 대신 언제 바뀔지 모르는 이 세상의 모래에 갇히고 지배받을 때, 사탄은 우리를 죄의 공허함, 무력감의 불안, 그리고 불만족의 피로에 빠지게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내면의 시선에 의존하여 삶을 사는 것은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고, 사실상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주는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한다(엡 4:17-18).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또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오로지 창조자 안에 있을 때 뿐이다(행 17:28). 그리고 언제나 선하고 믿을 만하며 끝까지 지속되는 갈망은, 내적인 모순투성이인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4. 문화는 언제나 진보한다


대학생의 용기, 추진력, 창의성 및 기술 혁신은 세계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곤 한다. 이는 교회가 그들에게 투자하고 또 그들로 인해 새롭게 되는 유익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대학 시절에 열린 가능성이 가져다주는 모험에의 열정을 느꼈다. 특히 세상의 영원한 선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라는 부르심을 느끼며 인생의 모험을 하고 싶은 강한 충동까지 느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문화적 흐름에 이끌리는 것을 보았다. ‘진보의 길’과 ‘역사의 옳은 편’이라는 미명 하에 이것은 사실상 파괴로 이어지는 넓고 넓은 길이다(마 7:13). C.S. 루이스는 수십 년 전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당신이 지금 잘못된 길에 있다면, 진보는 바로 거기서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 바른 길로 가는 것이다. 바로 그 경우에는 가장 먼저 몸을 돌리는 자가 가장 진보적인 사람이다… 인류가 뭔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길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인생 어디에서나 우리는 선한 싸움을 기꺼이 싸우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딤전 6:12).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현실을 관장하고 있는 영적 세력인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다(엡 6:12). 우리를 향한 조롱이나 호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듣는 인간의 칭찬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 만날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 가져다 줄 상급이기 때문이다(갈 1:10). 


아무도 당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라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당신을 속이게 하지 말라(살후 2:3). 당신의 믿음과 희망을 유식한 교수에게 두지 말라. 인터넷에서 만나는 믿지 않는 자들의 헛된 논쟁에 설득당하지 말라. 세속주의와 과학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신에 대한 필요성을 없애겠다는 건방진 주장에 낙심하지 말라.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불과 같은 시련에 결코 놀라지 말라(벧전 4:12). 


대신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교수들을 찾으라. 영감 받은 성경 저자들, 교회의 신실한 리더들, 지금 당신과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을 찾으라(히 12:1).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요 1:1).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약 1:5). 그리고 당신 자신이 교수가 되어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이 뿜어내는 기쁨을 통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은 진리의 보물을 찾았음을 증명하고(마 13:44), 또한 당신이 믿는 것이 진리임을 사랑을 통해 증명하라(요 13:35).   




원제: Four Lies My Teachers Told Me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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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Kaitlin Miller

케이틀린 밀러는 University of Georgia와 Dallas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하고, 현재 Chick-fil-A Inc 서포트 센터에서 일하고 있으며, Passion City Church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