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by Justin Dillehay2020-03-04

강대상에 서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십니다. 단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한 번씩 웃음을 삼키곤 한다. “만약에 스물두 살이던 내가 지금 앞에 앉아서 현재의 내가 전하는 이 메시지를 들으면 뭐라고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과거에 나는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유의지 침례교(Free Will Baptist)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알미니안으로 자랐다. 십 대 때 리로이 폴라인(F. Leroy Forlines), 매튜 핀슨(J. Matthew Pinson)의 신학뿐 아니라, 좀 더 오래된 제임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와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신학에 심취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구원에 있어서 은혜는 꼭 필요하지만, 그 은혜가 반드시 불가항력적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버릴 수도 있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다.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함, 미리 결정되지 않은 자유함이 필요하다. 폴라인을 인용하자면 “영향을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관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방식이었지, 결코 칼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원인과 효과(effect)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이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우리의 인간 됨(personhood)을 존중한다. 하나님은 이 방식을 고수한다. 그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과 원인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차이는 바로 다음 한 단어, 보장(guarantee)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폴라인은 그의 책 ‘진리를 위한 추구’(The Quest for Truth)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칼빈주의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상당 부분 영향과 반응이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과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라도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원인과 효과를 다루는 것이다. 그 보장이 사라지면 칼빈주의도 사라진다.


그의 말은 맞다. 그때는 그에게 동의했다. 지금도 그에게 동의한다. 단지 나는 편을 바꿨을 뿐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짧게 말하면,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거꾸로 되짚어 보았다.


열정적인 설교자, 문제의 구절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는 종종 “구원의 황금사슬”이라고 묘사된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예지, 예정, 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라는 다섯 가지 “고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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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으로서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문제가 많은 구절로 보았다. 특히 29절은 예지 된 믿음에 근거한 선택(election-based-on-foreseen-faith)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주석가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 해석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절은 그냥 문제가 많은 예외적인 구절로 치부했다. 사실 그 어떤 신학 이론도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거 아니던가?


그러다가 나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로마서 설교를 듣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2004년,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때까지 어디서도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파이퍼의 흠잡을 데 없는 주해는 그동안 그 구절에 대한 내 해석의 약점을 알게 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설교 때문에 확실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설교로 인해서 최소한 내가 갖고 있던 자신감은 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나는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바울의 황금 사슬은 상당 부분 보장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슬은 떨어질 수 없는가?


한번 29절에서 30절까지 펼쳐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 위에서 아래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라. 그리고 이탤릭으로 된 단어와 그 단어 위에 있는 알파벳에 주의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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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A)을….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B)….
또 미리 정하신(B)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C)
부르신(C)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D)
의롭다 하신(D)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E) 하셨느니라"


알미니안으로서 조셉 벤슨(Joseph Benson)과 같은 성경주석가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동의했다. “사도는 지금 부름을 받아 의롭게 되고, 그래서 영화롭게 된 사람의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연구하면 할수록, 바울은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는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슬을 하나씩 살펴보자. (정확하게 하려고 나는 다섯 가지에 각각 알파벳을 붙였다.)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행한 어떤 특정한 그룹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에게 추가로 한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또한….미리 정하셨으니”). 각각의 연결에 등장하는 “또한”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이 바로 그가 미리 정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B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각각의 사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제 각각의 구절 사이에 중복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두 번째로 사용된 동사가 다음 구절에서는 첫 번째 동사로 사용된다. 바로 이런 동사의 쓰임이 이 다섯 구절을 하나의 사슬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결국 벤슨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분명하게 똑같은 숫자의 사람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을 하나님은 예정하고 예지하며, 또 부르시고 의롭게 만들어 영화롭게 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 = B = C = D = E.


알미니안으로서 나는 이 다섯 가지 단계는 단지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신앙 여정 정도로 이해했다. A그룹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E 그룹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고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과녁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 있는 만점짜리 동그라미(bullseye)를 향해 갈수록 동그라미가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를 자세히 연구할수록 이런 내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부름을 받은 모두가 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결국 그 부르심은 믿음을 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화보다 앞서기 때문이다(롬 5:1). 의롭다 함을 받은 모두가 다 영광스럽게 된다면 의롭다 함은 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외롭다고 하신 그 선언을 번복하지 않으신다.


이런 사실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로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파이퍼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파이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를 알게 했다.


황금 고리의 보장


바울은 왜 이 고리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28절에 나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단지 어떤 사실 주장(factual claim)을 하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는 지식 주장(knowledge claim)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바로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데?”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 황금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29절은 “그렇기에”(for)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28절의 내용을 입증하는 논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역자 주: 우리말 성경에는 for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즉 29절부터 시작하는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전에 너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입었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사슬 안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폴라인도 맞았다. 알미니안의 주장, 즉 영향을 주고 반응하는 형태 속에는 결코 보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이 전하려는 애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장은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사슬 속 어디가 되었든지 믿는 자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선을 이룰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결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롭다 함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슬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설교 또는 믿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족을 만드는 이 일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단지 영향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리 정하신다. 그렇기에 부름을 받은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롬 8:29).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결과는 확실하다. 형제들이여,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Romans 8 Made Me a Calvinist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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