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는 외면했지만,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영화
by Brett McCracken2020-02-20

‘저스트 머시’(Just Mercy), ‘다크 워터스’(Dark Waters, 3월 11일 국내개봉 예정), 그리고 ‘히든 라이프’(A Hidden Life)는 지난번 있었던 오스카상에서 그 어떤 부분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2019년에 나온 이 영화들은 연말에 있는 각종 요란한 시상식에서 사실상 외면받았다. 이 영화들은 선명한 도덕성과 용기를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2019년 팝 문화에서 만나는 좋은 순간을 요약한 글에서, 나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종종 만나는 “정의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열망”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사회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하고, 우리는 현실에서 불의와 악이 가져다주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비록 이런 현실에 있지만 우리는 완전한 정의를 향한 연합된 갈망이 여기저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2019년에는 이러한 정의를 열망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넷플릭스가 만든 ‘언빌리버블’(Unbelievable)과 ‘그들이 우리를 볼 때’(When They See Us)가 특히 그런 작품이었다) ‘져스트 머시’, ‘다크 워터스’, 그리고 ‘히든 라이프’는 우리 삶에서 특히나 중요하고 유익한 정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두드러진다.


정의는 인내가 필요하다


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인내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의는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종종 오랜 그릿(GRIT) -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로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투지를 의미한다 - 이 필요하다. 하루 종일 트위터에 글을 쓴다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십 년에 걸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행동만이 정의를 가져올 수 있다.


‘쇼트 텀 12’(Short Term 12)를 감독한 데스틴 다니엘 크레튼(Destin Daniel Cretton)이 메카폰을 잡은 ‘져스트 머시’는 제이미 팍스(Jamie Foxx)가 연기한 월터 맥밀란(Walter McMillian)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월터 맥밀란은 흑인으로 알라바마주에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마이클 조던(Michael B. Jordan)이 연기한 젊은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Bryan Stevenson)이 맥밀란의 변호를 맡았다. 이 영화는 맥밀란 외에도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여러 죄수를 석방하기 위해서 애를 쓴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스티븐슨이 2015년에 발간한 그의 책을 원작으로 한다. ‘져스트 머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수년간의 삶을 감옥에서 보낸 무고한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을 강렬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무고하게 유죄를 받은 이들의 싸움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남아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원더스트럭’(Wonderstruck)을 감독한 토드 헤이네스(Todd Haynes)가 메가폰을 잡은 ‘다크 워터스’는 정의를 추구하는 오랜 과정을 아주 잘 포착한 영화이다. 2016년 뉴욕타임즈 잡지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오하이오주 변호사, 마크 루팔로(Mark Ruffalo)가 연기한 롭 빌로트(Rob Bilott)의 이야기이다. 롭 빌로트는 공개적으로 유해 화학물질을 웨스트버지니아의 파커스버그(Parkersburg) 상수원에 버린 듀퐁(DuPont)과 무려 이십 년에 걸친 법정 분쟁을 벌인 인물이다. 독성에 오염된 물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암, 선천적 기형아, 그 외에도 수많은 병의 원인이 되었다. 두 시간 동안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나이 먹어가는 이십 년의 시간을 관객들이 훑어보도록 만든다. 특히 길고도 힘든 싸움을 벌임으로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게 된 빌로트가 늙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테런스 맬릭(Terrence Malick)이 감독한 ‘히든 라이프’도 정의를 위해 홀로 싸운 한 남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싸운 오스트리아 농부, 프랜츠 에거슈테터(Franz Jägerstätter)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거슈테터를 다룬 것은 ‘60분’(60 Minutes)과 같은 다큐멘터리나 잡지 기사도 없다. 그는 평생 추구하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이야기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며 때로는 살아서 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정의는 주인공이 살아있는(life) 동안에는 숨겨진(hidden) 그 무엇이다. 희망은 미뤄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실로 힘든 현실이다. 종종 정의는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정의는 외로운 싸움이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정의를 추구하는 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각각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다.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싸움의 대가는 혹독하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자의 정신 상태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정도이다. 반대자, 비판자, 그리고 적은 사방에 널려있다. 내 편은 거의 없다.


‘져스트 머시’에서 스티븐슨은 뼛속까지 인종 차별로 가득한 전체 시스템과 싸우는 한 명의 변호사이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롯은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와 싸우고 있다. ‘히든 라이프’에서 에거슈테터는 그의 확신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라 전체(그리고 교회 기관)와 싸우는 초라한 농부이다. 이들은 싸우는 동안 하나둘 친구를 잃고 또 명성까지 잃어간다. 주인공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들의 싸움이 가치가 있는 건지 의심할 정도이다. 싸움의 과정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내적으로 절망의 시간을 만난다. 어쩌면 냉소하는 자들이 맞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인지도 모른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레트는 앤 해써웨이(Anne Hathaway)가 연기한 그의 부인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어떤 시스템도, 그게 회사이든 정부이든, 또는 규제 기관이든 우리의 유익에 관심이 있는 곳은 없다고 한탄한다. “시스템 자체가 조작되었어.”라고 빌레트가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길 원해. 그러나 우리를 보호하는 건 우리 자신이야. 우리 자신뿐이라고!” 이건 너무도 슬픈 현실이고 또 너무 냉소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상은 실로 냉담하기 이를 데 없다. 바른 일을 한다고 반드시 보상이 따라오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건 이익도 또 인기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익이 되기보다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건(이 타락한 육체가 추구하는 논리와는 반대되게도), 정의의 추구가 결코 당신 자신을 높아지게 하거나,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싸움이든, 기업의 불신, 무모한 오염, 대량 학살, 낙태, 성매매, 또는 다른 각종 악에 대항하는 싸움이든지 관계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다. 약한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정의는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정의는 사랑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높은 진실성을 추구한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있는 고귀함을 알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한다. 양심으로부터 들리는 소리, 또는 그리스도로의 부르시는 소리, 정의를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결코 거만하고 허영심 가득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물론 분노도 포함된다. 각각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분노의 순간을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외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악당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다. 스티븐슨은 제이미 팍스가 연기한 맥밀란의 지치고 힘겨운 얼굴을 보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빌레트도 이와 비슷하게 사랑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건 듀퐁의 화학물질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어가는 사람, 성실하게 일하는 지역 주민들을 향한 사랑이다. 에거슈테터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향한 사랑, 그리고 민족주의에 오염된 교회, 또한 파시즘이 퍼지면서 피해를 받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치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일어났다.


인터넷이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차고 넘치는 오늘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성격 급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꾸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낙태를 막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도 자유주의자를 물리치려는 마음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환경 운동도 오염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염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정의를 해시태그 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오늘날 금세 증발하는 가연성(combustible)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정의”는 비극적일 정도로 추상적이고 정치화되어버린 단어이다. 정의는 단지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해야 하는 어느 한쪽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정의는 성경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단지 해시태그 다는 것, 또는 “탈진실”(woke: 최근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신조어) 전쟁에 참가하는 빨치산 병사가 되는 것으로 축소할 때,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놓치게 된다. 영화와 TV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는 진짜 얼굴, 진짜 고통과 불의를 만날 수 있다. 정의를 추구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우리의 영혼은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지금 소개하는 이 세 영화를 꼭 보기를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원 차일드 네이션’(One Child Nation), 또는 ‘사마’(For Sama)와 같은 다큐멘터리도 꼭 보기를 바란다. ‘하얀 거짓말’(White Lies)과 같은 팟캐스트도 들어야 한다.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릴 수만 있다면, 여기에 쏟는 시간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Oscar Ignored These 2019 Films. Christians Shouldn’t.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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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ett McCracken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