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특권이다
by Burk Parsons2021-02-14

아침이든 밤이든 항상 그 언제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온 우주를 운행하는 이, 주권자이자 삼위일체이신, 전능한 하나님께 겸손히 그러나 자신있게 “아버지여~”라고 울부짖을 수 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지역 교회 목사로서 나는 수많은 배경과 문화, 그리고 다양한 나라와 종교가 섞인 다민족 공동체인 중부 플로리다 지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또 어떤 종교를 반대하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아버지되심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즉시 이렇게 반응한다. “글쎄요,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맞다. 바울이 아테네(행 17:29)에서 선언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소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이 전가해준 의로 인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가 될 수 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까지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있지만,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믿음으로 인해서 그의 아들과 연합한 자들만이 오직 하나님에게 입양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만이 바울이 자신을 포함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대상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또한 참고하라. 요 1:12; 롬 8:14–21; 9:8; 갈 3:26).


가족으로 입양


'아버지'라는 단어와 함께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주었을 때, 그는 이 세상 모든 인류를 다 포함하는 전 우주적 의미로 그 단어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또 우리와의 관계와  관련해서 보다 더 심오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단지 그냥 아버지(a Father)가 아니라 유일한 아버지(the Father)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을 때, 그는 우리를 가족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우리를 공동체를 위한 존재로 새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도록 부르신다. 공동체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당신을 예배하도록 하신다.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믿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언약 공동체인 살아있는 몸의 생명력 있는 한 지체임을 되새기게 된다. 


독생자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나 1세기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오만하게 여겨졌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요 1:14; 8:19; 14:7).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 것은 당시의 유대 랍비들의 눈에 좋게 봐줘야 교만한 행동, 최악의 경우에는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백하게 예수님이 자신을 거부하는 몇몇 유대인을 꾸짖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바로 사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요 8:39-47). 유대인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보냄받았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그들의 본성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성령님이 주시는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예수님이야말로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린 여자의 후손, 오랜 기간 고대하던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창 3:15; 사 9:6).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지 않은 본성의 상태였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복하고 친구와 아들로 삼기 전까지는 우리도 하나님의 적이었다.  


환영받고 축복받음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오직 그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와 형제된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그가 우리도 맞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많은 형제들 중 맏이가 되었고 따라서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거룩함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벧후 1:3-4). 


우리의 아버지는 자애롭고 또 너그러운 아버지이기에 이 땅에서 만나는 육신의 아버지가 돌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우리를 돌보시고, 이 땅의 아버지가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데, 이는 다 그가 이 땅의 아버지가 줄 수 없는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히 12:9-10; 롬 5:8).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은 욕망과 죄를 다 알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꾸실 수 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고, 또 우리의 아버지가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아예 간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는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고아처럼 간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는 단지 우리를 '입양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었고 또 다윗 왕과 원수 관계에 있었다. 우리는 단지 다리를 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로 죽었고 우리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과 원수가 된 존재다. 그러나 다윗이 므비보셋을 환대하고 축복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축복하신다. 그는 우리를 맞아서 씻어주심으로 그의 식탁에 편히 기대앉아 쉬게 하시고 또 함께 식사하고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하셨다(삼하 9; 요 13:1-20).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가 그의 영광 안에서 완전하고 세상을 초월한 존재며 하늘 위 영적인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우리 가까이 계시며 항상 존재하고 언제라도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와 소통할 준비가 된 아버지라는 것을 예수님은 상기시킨다(시 145:18; 렘 23:23; 행 17:28; 약 4:8).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어떤 권력자나 너무도 바빠서 결코 우리 근처에 오지 않는 그런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대신 아침이든 밤이든 항상 그 언제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온 우주를 운행하는 이, 주권자이자 삼위일체이신 전능한 하나님께 겸손히 그러나 자신있게 “아버지여~”라고 울부짖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을 때, 그는 또한 거룩히 여김을 받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도 가르쳤다. 하나님이 스스로 공개한 언약의 이름은 여호와다(출 3:14).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또는 거룩한 이름의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스스로의 선포에 의해서 거룩해졌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 큰 권위나 권세로 인해 구별되거나 성화된 것이 아니다(히 6:13). 그의 이름이 거룩한 것은 그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과 같지 않으며, 그의 이름은 단순히 우리가 그를 부르는 그 무엇이 아니며, 그의 이름은 그를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여호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이름이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에게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인정하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확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전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리고 거룩한 이름으로 존중받게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며, 일단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상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신 31:6; 히 13:5).




원제: Humbly Coming Before Our Father: The Privilege of Christian Prayer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하나님은 단지 그냥 아버지(a Father)가 아니라 유일한 아버지(the Father)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Burk Parsons

버크 파슨스는 올랜도에 위치한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박사학위(MDiv, DMin)를 받았다. 현재 플로리다주 샌포드에 위치한 Saint Andrew’s Chapel의 담임목사이며, Tabletalk Magazine의 에디터이자 Ligonier Ministries의 작가로 섬기고 있다.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외래교수이다. 대표 저서로 'Why Do We Have Creed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