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선교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의 은혜
by J. Nelson Jennings2021-08-04

기독교 복음이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절을 보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창조자이자 왕인 하나님과 씨름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아시아 지역 선교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이들 이전에는 프랜시스 재비어(Francis Xavier),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전세계에 걸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로지 아시아 선교와 관련해서만 보게 되면, 이런 유명한 사람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시아 선교를 제대로 조망하려면, 그 선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거기에 아시아라는 넓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려면, 대상이 되는 시간의 범위도 훨씬 더 확장해야 한다. 


성경은 서 아시아에서 아주 오래 전 발생한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 사역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지금 동서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하람으로 그를 이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별처럼 많게 할 것이고 또한 그에 따라 모든 나라를 축복하겠다는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그리고 그 주변부까지)을 서 아시아에 포함시키는 일반적인 관례를 따른다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구속 사역(이집트를 제외하고)과 복음서 및 다른 신약에 기록된 모든 구속 사역의 기록이 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순절 성령님의 부어주심에서 드러난 다양한 아시아인(“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 아시아,” 행 2:9)에 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을 떠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요한에게 특별히 나타난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아시아의 일곱 교회(오늘날 터키 서부)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 사역을 펼치는 데 있어서 특히 아시아를 중요시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시아 후속 선교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세상을 다룬 방식과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기독교 복음이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절을 보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창조자이자 왕인 하나님과 씨름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통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연합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나중에 힌두교로 알려진 종교 속 무수한 신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서사적인 기록에 푹 빠져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에 대한 도마의 증언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인도에서 시작하도록 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속 에데사(Edessa)를 지나서 인도와 로마 제국 사이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까지 믿음이 퍼져나갔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막아 온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대오와 바돌로매라는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3세기 후반,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Gregory the Illuminator)가 아르메니아에 도착했고, 왕 티리다테스(Tiridates)의 개종과 더불어 AD 301년에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런 초기 서 아시아에서 이뤄진 기독교 선교는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가 그레코 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기독교를 정치적, 지리적, 또 문화적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며, 재직기간은 428년 4월 10일에서부터 431년 6월 22일까지이다. 기독교의 한 갈래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시조이다)를 이단으로 선포함으로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몽고 제국은 13세기 태평양-유럽의 동서 상업, 문화 및 종교적 상호 작용의 정점을 찍도록 만들었는데, 초기 기독교로부터 무려 천 년이 지나서 발생한 그런 몽골 제국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에 대해 유럽이 거의 제대로 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와의 연결 내지 인식과 관계없이, 아시아 선교사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했고 7세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의 수도에까지 이르렀다.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그리고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기독교인은 숫자가 계속 늘어갔고, 오늘날 볼 때에 놀라울 정도로 어떤 때에는 그 숫자가 서구 기독교인의 숫자를 능가하기도 했다.


7세기 들어 시작된 이슬람의 전파는 대부분의 아시아에서 더 이상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떤 몽골 군주, 특히 1206년에서 1227년까지 다스린 징기스칸(Genghis Khan)은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타 종교에 관대했다. 13세기와 14세기 중에 새롭게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는 이미 잘 닦여진 실크로드를 통해서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야만적인 몽골 통치자인 티무르(Tamerlane)의 부상은 재결합한 몽골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왔다.


세상을 향한 유럽의 확장은 14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아시아 내 기독교는 남 아시아와 시리아 속에 존재하는 작고 연약한 모습의 1세기 후반 기독교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 후 7세기에 걸쳐서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은 새로운 서구와 잇는 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서구 선교사들은 아시아로 뻗어가는 서구의 상업, 정치 그리고 군사적 확장과 함께 들어왔다. 초기에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는 예수회(Jesuits)의 프란시스 재비어(1506–52)와 같은 선교사가 인디아와 남동 아시아, 일본, 그리고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예수회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혈통으로 담대하게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토착 사상과 융합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 ~ 1610)와 인도의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 ~ 1656)이다. 스페인의 보호를 받는 프란시스코회와 다른 가톨릭 선교사들은 새롭게 점령되어 필리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설교를 했다. 의심스러운 수준의 믿음과 열정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영국와 네덜란드 무역회사와 함께 도착했다. 어떤 지역에서 기독교 개종자의 숫자는 광범위했는데, 예를 들어, 인구가 이천만 명인 일본의 경우1614년에 이르자 어림잡아 삼십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새롭게 도착한 유럽인을 환영하는 아시아인들은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다.


17세기 이후로 해서 제국의 진보와 함께 아시아로 확산된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또한 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독일 경건파(Pietists) 소속의 바톨로뮤 지겐발크(Bartholemäus Ziegenbalg, 1682–1719)와 하인리히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52)는 덴마크의 후원을 받으며 1706년 인도에 입국했다. 1792년 윌리암 캐리의 인도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국 침례교 선교회(English Baptist Missionary Society), 1795년에 결성되어 중국에 간 최초의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파송한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812년에 만들어져서 최초의 북미 개신교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을 버마로 파송한 미국 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와 같은 개신교 선교 단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인 이유로 진출하는 나라라면 어디를 가리지 않고 함께 갔다.


1840년대와 1860년대 초 아편 전쟁(Opium Wars)의 여파로 생긴 유럽의 중국 내륙 진출은 영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1832-1905)에 의해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1865년에 생겨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시암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졌다.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말레이지아, 방글라데시, 포모사(Formosa), 세일론(Ceylon) 및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세기 미국의 확장은 미국 선교사들을 경제적으로 유리한 중국, 일본, 태평양 제도로 진출하도록 만들었다.


초기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 성장은 1630년대 후반에 있었던 가혹한 핍박 때문에 중단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뿐 아니라 1850년대 일본이 스스로 2세기 동안 시행한 서방 세계와의 격리 상태가 강제적으로 끝나고 난 직후에는, 일본에도 약간의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톨릭은 1780년대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핍박을 받았다.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가 열리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18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요한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의 조언에 따라, 선교사들은 교회 개척에 있어서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그리고 자전(self-propagating)이라는 “삼자(three-self)” 원칙을 도입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외국인과 한국 설교자의 공동 노력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그 성장은 1907년에 있었던 대 부흥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고, 또한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국 전쟁 이후 보다 더 집중적인 성장을 한 한국 기독교는 이제 선교사를 나머지 아시아 국가와 전 세계에 보내는 수준이 되었다.


왜 복음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많은 중요한 요인들 중에서도 한 가지 핵심적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가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deity)에 대한 토착 의식이다. 고대 한국에서 최고의 신은 하나님(Hananim)으로 불린다. 온 우주를 지배하고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신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모두 다 카미(kami)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열도를 창조한 신화적인 창조자, 자연을 다스리는 신비로운 힘, 그리고 지배자 가문의 조상 정도의 신은 있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supreme deity)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만이 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런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최근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은 아시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빠르게 바꾸기 위해 외국인 및 해당 국가의 복음 전파자를 사용했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북동부 인도의 나갈랜드(Nagaland) 정도가 놀라운 수준의 기독교 성장이 일어난 유일한 곳이다. 좀 더 최근을 살펴보면, 중국도 1억에 가까운 사람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거의 천문학적 성장을 이루었다. 국내외 아시아 선교사들은 인도, 싱가포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 그 어느 때 보다 “아시아 선교”라는 사명에는 이제 전 세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참여하는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원제: The Church in Asia

출처: www.ligonier.org

번역: 무제


한국 교회의 성장은 외국인과 한국 설교자의 공동 노력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그 성장은 1907년에 있었던 대 부흥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고, 또한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J. Nelson Jennings

J. 넬슨 제닝스 박사는 미국 뉴헤이븐에 있는 Overseas Ministries Study Center의 책임 이사장이며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의 공동 편집장이다. ‘하나님, 진짜 수퍼파워’(God the Real Superpower)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