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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여, 상상의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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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Abraham Cho  /  작성일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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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stock

우리가 전하는 설교를 통해 비신자가 경험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에 드리워진 커튼이 잠시라도 걷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보게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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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문을 걸려고 하는 것 같습니까? 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릴 적 듣던 동화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문은 마법을 걸 때도 쓰지만 깨뜨릴 때도 쓰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사악한 마법에서 깨어나려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합니다.” ( C. S. 루이스, ‘영광의 무게’)


나는 수시로 자문해 왔다. ‘설교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설교는 정말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걸까? 교리를 가르쳐 생각을 변화시키는 행위일까? 아니면 영감을 끼쳐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 그도 아니면 도덕적 교훈을 들려줘서 의지를 강화하는 행위?’


이런 질문과 함께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치 고속도로에 세워진 이정표를 쌩쌩 지나가듯, 매주일 설교도 그렇게 해 나갔다. 그러다 이러한 물음에 다다랐다. ‘설교란 그 모든 행위를 넘어선 작업이 아닐까? 어느 한 가지 행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 모든 행위를 수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그러나 뚜렷한 답변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매듭이 풀린 실처럼, 정리되지 않은 물음으로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상황을 통해 나는 그 실을 의미 있게 매듭지을 수 있는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각각의 상황에서 얻은 통찰은 모두 상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치다


첫 번째 통찰은 C. S. 루이스가 1956년 11월 18일자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다 얻게 되었다. 당시는 루이스의 기념비적 작품인 ‘나니아 연대기’의 최종편, ‘마지막 전투’가 막 출판된 해였다. 그가 기고한 아티클의 제목은 ‘가끔은 우리가 들어야 할 진리를 동화가 가장 잘 말해 주기도 한다’였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이 왜 동화를 쓰는지 설명했다. 그중 눈에 띄는 대목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동화란 내가 말해야 할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양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쓴다. [중략] 어린 시절 내가 품고 있던 신앙을 마비시킨 어떤 금기 사항 따위를 몰래 비켜 갈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주된 이유는 바로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데 있다.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당위는 느낌 자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중략] 그 모든 당위를 상상의 세계 속에다 던져 버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뒤덮인 성전과 주일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러한 느낌을 생생히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루이스가 보기에는, 상상을 통해서야 기독교 신앙을 억압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금기 사항, 다시 말해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게 된다. 훈계조의 설교를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기는 청중의 마음속엔 파수병이 세워져 있다. 그 파수병의 감시를 피해 갈 수 있는 게 바로 상상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감시하는 용을 지나치고 난 다음 희미해진 진리를 '생생히 되살리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루이스의 발상이 옳다면, 어린 시절의 신앙을 잃어버린 청중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의 상상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지닌 논변이나 정서적으로 깊은 영감을 끼치는 강연이라 할지라도, 용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끔찍한 결과만 초래하곤 한다. 그러나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용을 몰래 지나치게 도와준다. 이러한 발상이 흥미로워 나는 그 통찰을 마음에 잘 담아 두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다


두 번째 통찰은 몇 주 후에 찾아왔다. 바로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이 이성은 세계관 ‘안에서’(within) 작동하지만 상상은 세계관 ‘사이에서’(between) 작동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접했을 때였다. 이는 논리가 내적 일관성을 확립하고 그 일관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구성이 얼마나 촘촘하든 사실상 논리 자체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이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즉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그렇게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통찰을 제공했다.


이러한 통찰이 설교에 끼치는 영향은,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 곧 논변으로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가 전하는 설교를 통해 비신자가 경험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에 드리워진 커튼이 잠시라도 걷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보게 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 들어가 잠깐이라도 그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을 살펴보며 그 렌즈가 과연 자신에게 잘 맞는지 확인해 보고, 나아가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정말 어떠한 세상으로 변화될지를 가늠해 봐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비신자에게 상상이 일어나야 결국에는 팀 켈러(Tim Keller)가 자주 말하듯, “그 말이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리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네요”라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상상은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청중을 이동시킨다.


캄캄한 마음속으로 여행하다


세 번째 통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찾아왔다. 그 통찰은 평온히 책을 읽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상담 시간에 주어졌다. 당시 나는 수년 간 앓고 있던 우울증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어느 상담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상담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목사님은 지나온 길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또 그 경험이 현재 자신의 감정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훌륭하고 건강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치유란, 좌뇌의 활동이 아니라 우뇌의 활동에서 일어납니다. 치유는 목사님이 느끼는 감정에 관한 추론이나 지난날 경험한 일에 대한 분석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 모든 생각이 때로는 치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상처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그 상처를 느끼고 상상하며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때 목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새롭게 일어났는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으로 인해 실제로 모든 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날 나머지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로는 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자신을 감시하는 용과 세상의 단편적인 세계관, 그리고 상처 입은 영혼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바로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그리하여 인생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상상은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 세계 속에서 볼 수 있게끔 도와준다. 즉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


마법에 걸린 문을 발견하다


이러한 통찰 중 그 무엇도 서두에서 언급한 설교 행위에 관한 개념을 평가 절하하지 않는다.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며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청중의 정서에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복음으로 새로워진 인생에 거룩한 의지를 고양시키는 설교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 정, 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리하고 있는 모든 방과 연결된 홀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감추어진 문, 다시 말해 마법에 걸린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마법에서 깨어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무심결에 설교 역시 마법에서 깨어난, 상상이 결여된 행위처럼 여겨 왔을지 모른다.


보다 덜 알려진 또 다른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상상이 우리의 인식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좀 더 심도 깊게 다루었는데, 거기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 이성이 진리의 타고난 기관(the natural organ of truth)이라면, 상상은 의미의 기관(the organ of mean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메타포를 낳거나 옛것을 되살아나게 하는 상상은 진리의 원인은 아니지만 그 조건이 된다.”


상상이 진리의 조건이 되는 이유는, 상상이 진리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개념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자리한다.


바로 이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진리다(벧전 1:12).




원제: Stir the Imagination, One Sermon at a Tim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성우


상처 입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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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braham Cho

아브라함 조는 뉴욕에 있는 Redeemer Presbyterian Church East Side의 담임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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