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제국을 관통하다
by Nathan Tarr2021-02-04

막 일흔을 넘긴 나이의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중에 일곱 회중에게 보낼 편지를 씀으로써 교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 펼쳐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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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여름의 열기를 피해 한 노인이 족쇄를 찬 채 앉아서 글을 받아적는 이에게 뭔가를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말은 확신과 긍휼이 섞여 있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옆방에는 트라야누스 황제(emperor Trajan)의 군단 소속 군사 열 명이 하루의 피로를 풀며 술을 마시고 있다. 안디옥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은 비록 긴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군인들에게는 그게 다키아 전쟁(Dacian war)으로 다시 보내지는 것보다는 나은 길이었다. 


서기 107년 8월이다. 죄수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Ignatius)고, 겨우 2주 전, 체포되기 전까지 그는 안디옥의 주교였다.


사도 이후


이그나티우스가 콜로세움으로 가고 있던 당시 교회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그나티우스의 멘토였던, 사도 요한이 얼마 전에 죽었고,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증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위로하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지도해줄 지도자가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로와 지도에 대한 필요성은 매우 컸다. 로마 사회는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마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소외시키고 있었고, 당국은 기독교 예배에 있다는 이상한 의식(rites)에 대한 소문을 한층 더 강화된 박해로 대응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그 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결함을 노출시킨다. 교리적 차이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성육신의 진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Docetism, 가현설, 역자 주: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 또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에비온파의 주장(Ebionism)이 들어오기도 했다.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계속 확장됨에 따라서 교리와 삶의 양식에서 오는 오류는 오히려 배가되었다. 이 모든 문제는 바로 권위가 사라지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던 과거의 방법은 이제 사라졌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셨고 사도들은 다 순교했다. 영속적인 새로운 권위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신앙에 대한 고백적인 합의, 성경 표준에 대한 인정, 그리고 성경적인 교회 구조 등등 그 어떤 것도 결정된 게 없는 상태였다. 


마지막 일곱 개 편지


막 일흔을 넘긴 나이의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중에 일곱 회중에게 보낼 편지를 씀으로써 교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 펼쳐진다. 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그의 사역은 유성으로 비유되었다. 즉 이그나티우스의 인생에서 가장 밝은 순간은 바로 '화염에 쌓여서 죽기 직전에 주변을 아주 잠깐 밝게 비추는 바로 그 때'가 된 것이다(사도신앙의 전달자, Apostolic Fathers, 166).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목사로서의 역할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죽음보다 교회가 지향할 제자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를 베틀의 북(베틀에서 씨줄을 날줄 사이에 좌우로 넘으면서 천을 짜는 기구 - 편집자 주)과 같은 직조기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Christlikeness)이라는 실을 자기 뒤에 묶고, 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향할 아름다운 진리로 교회를 하나로 묶을 천을 짜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뇌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근심이라는 실을 가지고 그가 지금 짜고 있는 패턴은 최소한 다섯 가지 방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다. 


1. 십자가의 가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십자가는 주 예수의 지상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세상에서 예수 삶의 본질을 담아낸 것으로 십자가를 제시했다. 예수가 수동적으로 순종한 민감한 그 순간은 예수가 평생동안 지향했던 겸손의 완성이 되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사 53:3).


'모든 일에'(히 4:15) 걸쳐서 예수가 짊어진 고통에 대한 넓은 시각은 이그나티우스 뿐 아니라 그가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놀랍게 적용하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썼다. “누구라도 아버지가 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길, 또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품는 길은 순교자로서만이 아니라 제자의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그분의 고난 속에서 함께 죽는 것이다”(3.1).


2. 어리석을 정도로 다른 희망


두 번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 복음 선포의 중심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복음  선포에서 '열정은 우리에게 분명해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6.7). 이그나티우스는 갈보리에서 드러난 구원의 힘을 찬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을 피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에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목회 생활은 십자가에 의해 정해진다. 이그나티우스는 산 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올리는 크레인으로 십자가를  묘사한다(1.9). 주님의 마지막 만찬 속 부서진 예수의 몸과 흘린 피 옆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개혁하고(1.20),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십자가로 인한 회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의 약하고 무모한 공격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거부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말을 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귀머거리가 되어라. 예수는 진짜로 태어났고 진짜로 박해를 받았고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진짜로 다시 살아났다”(3.9). 그렇지 않다면, 즉 우리의 희망이 이 세상의 희망에 비교하여 명백하게 다르지 않거나 '어리석을 정도로' 다르지 않다면, 누군가는 예수를 육체를 입은 하나님임을 부인함으로써 “나를 찬양할지는 몰라도 내 주를 모독하는 것이다”(6.5).


3. 가장 미움받을 때 가장 위대해진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이다.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었듯이 나도 그를 위해 죽으려고'(4.6) 지금 로마로 가고 있는 것은 맞다. 그의 긴 여행은 이제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1.3). 그러나 기독교 제자도는 단지 순교라는 영적 은사보다 더 깊고 더 광대하다. 더 광대한 이유는 제자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세상의 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침'을 몸에 지녀야 한다(2.5). 더 깊은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통한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우리의 새롭고 또 '의로운 본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십자가를 우리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도록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그를 더 닮고 싶도록 만든다. 


세상의 분노를 향해서는 친절하라. 세상의 자랑을 향해서는 겸손하라. 세상이 주는 비난을 향해서는 기도하라. 세상의 오류를 향해서는 믿음 안에서 굳건하라. 세상의 잔인함을 향해서는 문명화되어라. 세상을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 대신, 우리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 속에서 사탄이라는 잡초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욕을 먹었고, 더 많이 속았고, 더 많이 거부당한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1.10).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예수님처럼) 가장 위대해진다”(4.3).


4. 하나님으로 가는 길


네 번째로,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싶은 이그나티우스에게 십자가는 그 중심이 되었다. 그가 쓴 편지 속에서도 가장 놀라운 부분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걱정 때문에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방해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리스도가 삶과 죽음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 그리고 나와 같은 죽음을 원하지도 말라”(4.6). 콜로세움으로 가는 이그나티우스의 길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 길 위에서조차 고난 속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는 그의 몸을 휘감은 사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가는 '영적 진주'로 바꾸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모범으로 만든다. 우리도 “망치질을 당하는 모루처럼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7.3). 우리도 항구를 향해서 가는 풍랑 속의 배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3.5).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박해받는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그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6). 참으로, “그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7.1). 그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고난 안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때문에, 고난은 탄생의 아픔에 불과하게 되었고, 무덤은 이제 자궁이 되었다. 그리고 죽음은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5. 성경이 열리다


다섯 번째로, 21세기를 사는 제자들이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아마도 가장 관련성이 높게 적용 가능한 것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십자가는 그의 성경해석의 중심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성경(구약 성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거부하는 한편, 이그나티우스는 복음 속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바꿀 수 없는 기록 보관소'로 이해했다. 구약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렌즈는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와 그가 이루신 일을 보는 것이다(5.9). 1세기 교회나  21세기 교회나, 하나님의 책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열쇠를 통해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여줄 때만,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고 선포되고 또 경배받으며 그의 제자를 거느리게 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이그나티우스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가 보여준 신실한 증거로부터 용기를 얻게 된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한 간증은 그가 콜로세움에 들어섰을 때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았고, 그 대신 그가 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교회를 살렸다. 성령님의 인도로 정경이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만든 신조를 통해 바른 믿음의 길이 명확하게 요약됨으로써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의 도리를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제국을 가로질러 가는 내내 이그나티우스가 짊어졌던 십자가에 또 그가 교회에 요구했던 그 부름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열거된 몇 가지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 기쁨, 그리고 생명이다. 




원제: He Carried a Cross Through the Empire: IGNATIUS OF ANTIOCH (35–107)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무엇보다도 우리는 제국을 가로질러 가는 내내 이그나티우스가 짊어졌던 십자가에 또 그가 교회에 요구했던 그 부름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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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Nathan Tarr

네이선 타아는 노스캐롤라이나 레일리에 있는 Christ Baptist Church에서 교육선교 담당 목회자로 섬기고 있다. 'The Fruit of Lips That Acknowledge His Name: The Witness of Pastor Paul Schneider'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