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내기 제대로 이해하기
by John Piper2021-01-08

흔히들 생각하듯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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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는 현명한 도전이 될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파스칼의 ‘팡세’(Pensées)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자면, 그 내기는 이런 것이다.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의 이성은 선택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 신의 존재와 부재라는 극단 사이에 놓인 무한한 거리에 대한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이성으로는 … 신의 존재나 부재 중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다. …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골라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내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뭘 고를 것인가? … 무엇을 선택하든 ‘이성’은 거의 상관하지 않는다. 반드시 골라야 하므로 고른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의 ‘행복’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고르면 어떤 득실이 있는지 계산해보자. …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고, 만일 하나님이 없다 해도 손해볼 것은 없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라. … 이 내기에서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무한히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는, 즉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무한하다. … 무한성을 취할 가능성이 있고 질 가능성은 유한하기만 하다면 우물거리지 말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


득실 가능성이 동일한 어떤 도박에서 만일 유한한 것을 걸고 이김으로써 무한성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고도 명백하다. 이는 어떤 사람이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리다.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를 오도할 ‘파스칼의 내기’


흔히들 생각하듯 파스칼의 내기를 단순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압도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지 않고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자연을 관찰할 때나 못 박히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하나는 골라야 해,’ ‘하나님을 선택해’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당신에게 확신을 주고 당신을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선택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다.’ 초자연성이 배제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흔히 우리가 잘 모르는 것에 끌리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이 증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 얻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이성과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분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죽어있는 영혼 속으로 불어 넣어진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요일 5:1). 이것이 바로 믿음이 세워지는 방식이다.


이러한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육(肉, flesh)이요, 인간이요, 자연인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고(롬 8:7),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롬 8: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게만 본다(고전 2:1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개함을 주셔야 한다.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다시 말해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해주셔야 한다는 뜻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5).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벧전 1:23) 된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의 빛을 비춰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초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영적으로 보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의 기반이다. 우리의 눈으로 하늘의 태양을 보듯,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압도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입에 넣었을 때 그 맛을 거부할 수 없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면 그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에게 확신을 주며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면,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스칼의 내기를 흔히들 생각하듯 단순하게 대하면 이 내기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말 것이다. 파스칼의 내기 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체험하지 않고도 말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듯, 그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아니다.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주는 ‘파스칼의 내기’


사실 파스칼 자신도 위와 같은 오류를 인지하고 있었다. 파스칼은 내기의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래도 카드 앞면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아마도 성경과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것일 거다.) “날 보세요. 손이 묶였고 입도 막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내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자유가 없어요. ‘속박된 상황이에요. 그래서 믿을 수가 없네요. 이제 나에게 뭘 하게 할 건가요?’”


파스칼의 대답은 이렇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하지만 적어도 당신에게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라오. 이성으로 인해 여기까지는 왔지만 여전히 믿을 수는 없소.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것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설득하도록 계속 애쓰시오. 믿음을 얻고 싶소? 하지만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당신의 불신앙을 고칠 수 있는 치유책을 찾고 싶소? 당신처럼 한때 속박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자신의 모든 소유를 걸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우시오. 그들은 당신이 찾고자 하는 그 길을 알고 있소. 그들은 당신이 치유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병을 치유받은 자들이라오.”


팡세의 간결함으로 인해 우리는 불신앙에 대해 파스칼이 어떤 “치유책”을 제공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대답의 요지는 당신이 이미 믿는 것처럼 가정하고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 그 확실함을 모두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 이 여정에서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분명히 얻는 것은 많고, 잃을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이 내기에서 당신이 전혀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확실하고도 영원한 무언가를 골랐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파스칼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벧전 1:23) 하나님의 말씀에 네 자신을 헌신하여 거듭남의 기적을 추구하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 생각엔 아닌 것 같다. 파스칼은 로마 가톨릭의 성례주의(sacramentalism)에 여전히 갇혀 있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진지한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성수(聖水)를 받고, 미사를 드리는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라 말한다. “이렇게만 해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좋은 가르침은 아니다. 하지만 파스칼의 내기 자체는 그 복잡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준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은 이제 성수나 미사를 통해 믿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것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원 얻는 믿음 없이 살 수 없다. 이는 단순한 내기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복음에 나타난 바 우리를 사로잡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고, 그의 아름다우심에 대해 확신을 얻고 그것에 압도당한 채로,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 그리스도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원제: Pascal’s Wager: Misleading, But Challenging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구원 얻는 믿음의 뿌리는 우리의 이성과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목도하고 그분을 조금이나마 경험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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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