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
by John Piper2020-04-0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9-10).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분은 비천한 짐승에 올라타 성읍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곧 어떤 일이 닥칠지를 알고 계셨다. 즉 원수의 세력이 득세하여 자신을 배척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고 한 세대 안에 예루살렘조차 완전히 파멸되리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신 그분 안에서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 1:11). 그들은 “보살핌 받는 날을”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the stumbling stone)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분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림당하셨다. 바로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예수님은 보셨다.


왕이 우시다


이에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눈먼 상태를 보시며 다가오는 비참한 상황 때문에 우셨다.


당신이라면 이 눈물을 어떻게 묘사하겠는가? 나는 이를 ‘주권자의 자비가 서린 눈물’(tears of sovereign merc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경배하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그분을 소중히 여기며 자비로운 주권자이신 그분만 예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자비에서 비치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도 비로소 그분과 함께(with him), 그분처럼(like him),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for his glory) 자비로운 마음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 함께 경배해야 한다.


자비로운 주권을 생각하며 경배하라


우리에게서는 상반되게 나타나는 여러 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모든 이들과 다르신 그분을 경배한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바는 이렇다. 곧 최고 통치자의 절대 주권 아니면 따뜻한 마음으로 베푸는 자비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게 되면, 자비로운 주권과 주권적인 자비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완전한 상태에 어떤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리더라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


우리가 종려주일을 소개하는 본문을 읽으며 예수님의 주권을 묵상할 때, 유념해야 할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로, 당시 군중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 있는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눅 19:37).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며 그 몸을 고치신 적이 있다. 또 눈먼 자로 보게 하셨고, 듣지 못한 자의 귀를 열어주셨으며, 못 걷는 자를 일으켜 걷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하시자 그들이 복종하며 떠나기도 했다. 나아가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고 물 위를 거니셨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무엇도 그분의 입성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저 말씀만 하셔도 빌라도가 물러가고 로마 군대도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그분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군중은 이렇게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 19:38). 예수님은 왕이지만 일반적인 왕이 아니셨다. 그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명하여 보내신 왕이셨다. 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그분을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는 굳건한 나라의 통치자가 바로 그분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영원한 나라가 언급되어 있다.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통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와 먼 은하계까지 두루 미친다. 또 그분 앞에서는 미국이나 ISIS 혹은 그 어떤 정치 집단이라도 한 줌의 모래나 사라지는 입김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며 찬양하는 군중의 소리를 바리새인이 멈추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분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그 이유는, 예수님이 찬양받아야 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온 우주가 오직 그리스도를 찬양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분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자신이 취하셔야 할 영광을 반드시 취하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기쁨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다.


실패가 아닌 성취를 보라


그럼에도 예수님이 보이신 눈물을 지적하며 그분의 주권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신 까닭은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 결국 실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백성이 구원받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완강하여 그분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끝내는 십자가 처형에 그분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로써 자기 백성을 향한 그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주권을 반대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분은 돌들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마찬가지로 돌같이 굳어진 마음을 가진 예루살렘 백성으로도 찬양하게 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저들의 반대와 핍박, 그리고 자신을 죽인 행위까지도 다 받아들이셨다. 이는 그 모든 일이 자신이 세우신 계획의 실패가 아닌 성취를 이루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한번 들어 보도록 하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즉 계획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9:31-33).


배신과 희롱, 능욕과 침 뱉음, 채찍질과 살인, 이 모든 일이 다 계획되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완강하게 거절하며 불신과 적개심을 품고 예수님을 대적한 일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계획의 일부일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이미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이렇듯 하나님은 저들이 굳은 마음을 갖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전능과 자비를 함께 보이시다


하나님의 자비는 주권자가 베푸시는 자비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종려주일에 깊이 묵상해야 할 진리가 여기에 있다. 바로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멸망을 앞둔 완고한 예루살렘 백성을 보며 우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비가 깃든 눈물을 보며 마치 흔들림 없는 주권에 상반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판단이다. 예수님은 슬픔 가운데서도 흔들림이 없으셨고, 또한 흔들림이 없는 주권 가운데서도 슬퍼하셨다. 예수님의 눈물은 자비로운 주권자만 흘리실 수 있는 눈물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분의 주권적 능력은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상호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자비’와 ‘전능’ 같은 속성들이 서로 하모니를 이룰 때,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부르는 찬송처럼 말이다(“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자비하신 주여 성삼위일체 우리 주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비로우신 분의 능력이며 또한 그분의 자비가 전능하신 분의 자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욱 소리 높여 찬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종려주일에 그 진리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맛보기를 소망한다. 곧 주권자가 흘리신 눈물과 그분이 이루신 자기희생적 사랑, 그리고 고난주간의 모든 여정을 홀로 걸어가신 그분의 순종을 묵상하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이 주간에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며 찬양을 올릴 때, 우리가 바라보는 그 진리로 인해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마침내는 더욱 부드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타인의 필요를 채워 주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avior’s Tears of Sovereign Mercy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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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ohn Piper

존 파이퍼는 desiringGod.org의 창립자이며,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총장으로 33년 동안 미네소타에 위치한 Bethlehem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로 섬겼다. 대표작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가 있으며, 최근 저술한 ‘내가 바울을 사랑하는 30가지 이유’​ 외에 5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