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앗아가는 두 대적
by 고상섭2019-11-23

팀 켈러(Tim Keller)는 그의 저서 ‘센터처치’(Center Church)에서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복음과 그 혜택을 분리시키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두 가지 오류가 발생되는데 그것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이다. 터툴리안은 “예수님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복음은 두 오류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했다. 이 두 오류는 ‘종교’, ‘비종교’ 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도덕주의, 상대주의라고도 불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가리키는 말이다(팀 켈러, ‘센터처치,’ 59).


복음과 복음의 혜택이 분리되지 않는 복음이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구원을 받은 은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복음과 그 혜택이 분리가 되면,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제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흔히 설교자들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행할 때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율법주의’에 걸린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노력하기를 포기하면서 ‘반율법주의’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온전한 그리스도’(The Whole Christ)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했다(109).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동일한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일 것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말하고 집을 나가는 탕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둘째 아들인 탕자는 반율법주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없이 자신 마음대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자유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눅 15:29) 왜 나에게는 이런 잔치를 열어준 적이 없냐고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아마도 율법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아들은 모두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두 종류의 신앙이다. 늘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또 반율법적인 삶을 살 때가 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은 이유는 그런 순종을 통한 또 다른 보상을 얻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분노했고, 자신의 순종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율법주의는 늘 이렇게 숨어 있다가 결정적일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했는데 무언가 숫적인 부흥이 없거나 뜻 대로 되지 않을 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좋은 직장을 버리고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도 “내가 주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버렸는데 왜 선교지에서 예상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지?”라는 원망이 들기도 한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바로 율법주의의 모습이다. 


이렇게 율법을 지킴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하던 노력들이 너무 힘들어지면 반율법주의로 바뀔 때가 있다.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제약을 주실리가 없다는 잘못된 오해가 반율법주의적 삶으로 인도할 때도 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오해하여 “이런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실텐데” 라는 적용을 할 때도 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두 가지 잘못된 대적들이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나님을 엄하고 두려운 분으로 오해한다. 반율법주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떤 제약도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정도로 오해한다. 


모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의 출발은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에서 하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여 죄를 범하였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한다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금하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만 하라잖아”라고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것이 있고 금지한 한 가지가 있지만 하와의 눈에는 오로지 금지 명령만 보였다. 하와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율법폐기주의’로 간 것은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복을 주는 ‘율법주의’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두 가지 길을 추구한다. 한 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이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복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팀 켈러는 목회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한 가지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그것을 오해할 때 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반율법주의를 또 반율법주의의 해결책으로 율법주의를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두 아들 모두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들 모두를 소중하게 여기며, 자신의 사랑과 잔치 속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두 아들 모두를 초대한다. 이는 예수의 메시지(복음)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길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복음은 종교도 비종교도 아니고, 도덕도 비도덕도 아니며, 도덕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니고,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니다. 그렇다고 두 극단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예수의 복음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팀 켈러,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56-57).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다. “율법주의의 진정한 치료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복음이 율법 폐기주의에 대해 처방하는 치료제와 동일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하고 실제로 맛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그것에 순종하려는 새 마음이 절로 우러나온다. 이제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할 힘을 주신다. 이것만이 율법주의(율법이 더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는다)와 율법 폐기주의(우리가 율법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제 율법이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에게 오며, 우리 마음에 그 율법을 쓰신 성령이 그것을 지킬 힘을 주신다)의 속박을 모두 깨드리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이 치료제가 아니면 율법주의자든 반율법주의자든 모두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올바르게 연관될 수 없다.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211).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한 “의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결합되지 못한다”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기쁨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적이다. 결국 바른 복음을 선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 그분 자체를 향한 사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향한 자발적인 순종이 흘러나오게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저 형벌에 대한 끔찍스러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기리기 때문에, 또한 그를 주로서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원광연 역, 48).


설교자들여!  복음을 먼저 누리라, 그리고 바르게 선포하라.


그때 우리의 양떼들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길이 아닌 복음이라는 아름다운 길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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