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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문제,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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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Samuel Emadi  /  작성일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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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Guillaume de Germain on Unsplash

상대방이 지구의 연대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이 얼마나 긴지를 따져 보기 시작하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리고 의혹의 시선을 그에게 보낸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그의 견해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 그러한 견해 차이가 신학적인 노선 차이로 여겨질 때면 더욱 그렇다. 흔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도 관대한 태도를 보이지만, 유독 창조 문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과 곧잘 싸울 태세를 갖춘다.


지나온 상황을 한번 돌아보면,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오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이든 서로의 도전에 직면할 때 느끼는 불편이나 의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가령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신학계에서 창조론 대 진화론의 논쟁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와 현대주의자(modernist)를 가르는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한 지난 역사가 한몫을 해서인지,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실제 기간 따위를 따지는 문제는 소위 대속의 범위라든가 은사지속론 대 은사중지론에 관한 논쟁보다도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그 결과,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창조 문제가 언급되면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겠지만,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가 경박스럽게도 다윈의 진화론에 이끌려 결국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보는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자는 젊은 지구 창조론자의 논의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장르에 대한 고려도 없이 진화론에 대한 우려만 느낀 나머지 지성적으로 천박한 근본주의 신학의 족쇄를 차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신학적인 논쟁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라


결국 창조 교리를 대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문제는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할 신학적인 주제를 올바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특정 주제가 기독교 세계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또 복음의 메시지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그 중요성에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은 1차적인 주제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한 가르침 없이는 복음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예 상실하게 될 수도 있는 주제가 그에 해당한다. 2차적인 주제는 교단이나 교회를 분리시킬 정도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띠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를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령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또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 아니면 언약주의자와 세대주의자 등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달리 3차적인 주제는 복음이나 기독교 세계관에 훨씬 덜 영향을 미치는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렇게 3단계로 구분하는 차등적인 접근이 모든 교리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가 지닌 신학적인 확신이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덜 본질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을 달리한다는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1차적인 주제가 신학 자체의 신뢰성을 판가름하는 문제에 해당한다면, 2차 혹은 3차적인 주제는 형제자매들 간에도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와 같은 불일치를 감수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일부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교리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어떤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작업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삼위일체 교리를 포기하면 복음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지만, 천년왕국설에서 당신이 선호하는 견해를 포기한다고 해서 당신이 믿고 있는 신학 체계 전반에 손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특정 본문에 대한 해석을 양보하면 될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나는 여기서 지구의 나이라든가 창세기 1장 사건의 기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 그러한 주제에 대해 어떠한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는 젊은 지구 창조론을 지지한다). 지금 강조하려는 바는, 창조 교리에 있어 1차적인 주제를 2, 3차적인 주제와 구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의혹을 줄이고, 가능하다면 누군가를 가르칠 때 창조 교리에서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지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학적인 주제에 차등을 두는 일은, 어떤 지점에 있어 서로가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도 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뿐 아니라 타협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신을 공고히 세우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한 가지 예로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종말론에 대한 입장 차이를 서로 어떤 자세로 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 글에서 내가 제안하고 있는 신학적인 차등을 고려하는 태도를 매우 잘 보여 주게 되었다. 원래 20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전천년주의를 부정하는 일은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일과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종말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등이 1차적인 주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요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천년왕국이라든가 휴거 또는 적그리스도와 같이 부차적인 주제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1차적인 주제를 설정하라


창조 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를 구분하는 작업을 할 때, 이미 유사한 작업을 수행한 역사적인 선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창세기의 시공간성’(Genesis in Space and Time)이라는 작품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이 일관성과 진정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창세기 1-11장 본문을 통해 우선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진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도 창조와 관련된 일곱 가지 포인트를 1차적인 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각 포인트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와도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이러한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창조 기사를 읽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
2.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신다.
3.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4.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5.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6.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첫 조상이다.
7. 아담과 하와는 태초의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께 실제로 불순종했던 역사적 인물이다.


성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포인트를 창조 기사뿐 아니라 여러 본문을 통하여 증언한다(롬 4:17; 고전 1:28; 고후 4:6; 히 11:3). 이 두 가지 포인트는 하나님이 스스로 영존하신다는 자존성의 진리를 대변한다. 세 번째 포인트는 독자가 창세기 1장의 장르와 해석에 대해 어떤 접근을 취하든지 간에 그 본문이 자체적으로 증언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창조에 반영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전제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발흥하는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를 반박하는 기독교 변증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네 번째 포인트는 성경의 거의 모든 내용을 통해 확증된다. 이 포인트는 우리의 신학이 바른 궤도를 따라 돌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한다.


다섯 번째에서 일곱 번째 포인트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다룬다. 내가 보기에 창세기 1장의 연대는 복음주의자들 간에 혹 이견이 발생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창세기 2-3장의 역사성은 논의의 주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 또 배우자를 허락하시며 가정을 세우셨으나 이내 그들이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재로부터 그들을 쫓아내신 이야기 등은 반드시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는 다섯 번째 포인트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론의 신학적 토대를 상실하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한 의식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류가 한 시조를 공유한다는 여섯 번째 포인트를 포기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인종이나 민족성 또는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인류 공동체를 이루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행 17:26). 마지막으로 아담의 타락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일곱 번째 포인트를 부정하게 되면, 원죄 교리 역시 부정해야 할 뿐 아니라 아담과 그리스도의 모형론을 위시한 핵심적인 성경신학도 세울 수 없게 된다(롬 5:12-21).


서로를 받아주며 논쟁하라


이와 같은 1차적인 주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대에 대한 의혹을 품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신학적으로 논쟁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때로는 필요하기까지 하다. 물론 서로가 성경의 무오성을 힘있게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일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창세기 1장이 내포하는 물리적 시간이라든가 지구의 나이 또는 타락 이전의 동물의 죽음이나 포식 관계 등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에 관해서는 1차적인 교리에 대한 확신과 모순되지 않는 선에서 이해하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놓고 논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따지기보다 그에 관하여 어떤 자세로 논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결국 창조에 관한 대화 자체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에 관해 아예 토론하지 않는 게 우리의 상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자신의 견해를 엄격하게 방어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얼마간의 잉크를 거기에 쏟아붓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로의 피를 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 창조 교리에서 1차, 2차, 3차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ological Triage and the Doctrine of Creation

번역: 장성우

작가 Samuel Emadi

사무엘 에마디는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으며, 현재 9Marks의 편집장으로 섬기고 있다.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ird Avenue Baptist Church의 성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