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교리가 왜 그토록 달콤한가!
by Aaron Menikoff2020-02-11

판사가 몇 마디 선언과 함께 망치를 친다. 그러면 한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이 주어진다. 미국 전역에 있는 법정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씁쓸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한 일이라고 할까. 친부모에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이 없거나, 그 부모가 아예 양육 자체를 거부할 때, 아이는 입양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판사의 판결이 내려지면 그 아이는 따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새로운 부모에게 완전히 소속된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입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특히 크리스천에게 그 관심은 야고보서 1장 27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구절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순결한 신앙에 대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크리스천으로서 이 구절을 적용하기 위해 실제로 고아를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입양이란 어느 한 구절에 근거해서 이뤄진다기보다는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입양 교리가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입양하신 하나님


입양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신 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자비로운 행위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그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긍휼과 보호와 공급과 훈계를 받고, 결단코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그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의 획득으로 입양을 설명한다.


세상에서는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입양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정이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정말 새로운 가정에 소속되었으며 그 가정이 자신에게 주어진 게 맞는지 의아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입양하시는 일에는 그와 같은 의심이나 불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다른 누가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죄인을 자기 자녀로 삼으신다(요 1:12). 이와 같은 의지는 완전하여 결코 바뀌는 법이 없다.


하나님의 입양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과 그칠 줄 모르는 사랑에 기초해 있다. 산맥이 형성되고, 강물이 흐르며, 하늘에 새가 날기 전부터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인을 자기 가족으로 입양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는 그렇듯 창조 사역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를 향해 자신의 친구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사 41:8; 약 2:23) 자녀라고도 부르신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이러한 자비에 우리는 그저 경탄할 수밖에 없다.


가장 달콤한 교리


입양을 가장 달콤한 교리로 표현하면 좀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신학자는 그 교리가 얼마나 우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지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존 대그(John Dagg)는 “칭의보다 높은 수준의 은혜를 보여 주는 축복”이라며 입양을 칭송했다. 누군가를 사면하는 일은 판사가 하지만, 그 사람을 입양하는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도 입양이야말로 칭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표현했다. 로버트 웹(Robert Webb)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모두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그 자녀를 부드러이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달콤하게 느낀다. 때로 고난이 우리를 덮치고 근심이 홍수처럼 밀려오면, 우리는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손을 뻗친다. 혹 죽음의 천사가 문간에 들어서며 사랑하는 이를 데려갈 때조차,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묵상하며 가장 친밀한 위로를 얻는다. 그리하여 세상의 위협이 물결치며 크게 범람할지라도, 우리는 저 별들 너머로 빛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거기에 세워진 아버지의 집을 묵상한다. 그러면 무너져 가는 이 땅의 장막 가운데서도 큰 격려를 받게 된다.”


이러한 교리는 단지 전문적인 신학자들만 음미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입양에 내포된 보석 같은 진리는 미국의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 크리스천 노예들을 붙들어 준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잔혹한 속박을 견디게 하고 때로는 생명을 걸고 자유를 찾아 떠나도록 만들어 준 진리가 바로 입양 교리였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단지 주권을 행사하시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한없이 자애로우신 아버지로도 보였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가정의 노예로 살았던 앨런과 윌리엄 크래프트 부부(Ellen and William Craft)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의 입양 교리를 묵상하면서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불을 끄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기도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셨듯이, 이제 우리도 잔인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입양을 주제로 한 성경 이야기


크래프트 부부에게 성경이란 입양을 주제로 한 이야기였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 원래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을 돌보시며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계시면서 동산을 거니시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창 3:8). 그러나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산 밖으로, 즉 아버지의 임재 밖으로 그들은 추방되었다(창 3:24; 롬 5:12).


이후 아브라함을 통해 번성한 아담의 자손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성경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 자손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며 다시금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출 4:22-23). 하나님은 타락한 그 백성을 불러내어 자기 곁에 두고자 하셨다. 그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면 다시 한번 그들 가운데 거하겠다고 약속하셨다(레 26:12). 마치 지난날 에덴에서 그러하셨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법도와 사랑을 거부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그분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가 되시건만(시 103:13), 그 누구도 그분을 그렇게 경외하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전율을 일으키는 큰일을 행하셨다. 바로 완전한 주권자요 공의로운 창조자이신, 그 영원하신 아버지가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에서 고통받고 죽으시며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큰일을 이루셨다.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을 이루신 것이다. 또한 그 대속을 적용하여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롬 3:24),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고후 5:17). 그리하여 자기 가족으로 그들을 입양하신다(갈 3:26; 4:4-7).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 깊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어딘가를 찾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늘 아버지만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능을 따라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소속감을 주실 수 있다. 곧 세상의 죄인들을 자신의 자녀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다(롬 8:17).


입양 교리가 달콤한 이유


그러므로 입양 교리는 달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진리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첫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누구든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확신을 갖게 된다(롬 8:15-16). 이 확신은 방탕한 아들을 한없이 품었던 그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마음이다(눅 15:11-32).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라면, 당신을 자기 자녀로 입양하신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기 바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당신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분이 당신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입양 교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혹 당신이 해외에서 다른 신자들을 만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당신과 비슷한 모습들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언어나 문화에서 느껴지는 차이와 상관없이, 모든 크리스천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깊은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모두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자매가 된다. 이처럼 우리는 전 세계에 가족을 둔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를 우리에게 가족으로 허락하셨는데, 특별히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에서 그 가족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때 기존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바가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리라는 약속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우리의 신앙생활은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다. 곧 우리 각자가 속한 지역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그 모임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가 고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가 자신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로 입양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우리 역시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도와준다. 몇 년 전에 아내와 내가 한 아이를 입양했을 때, 우리는 어떤 의무감에서 그 일을 한 게 아니었다. 당시 우리는 야고보서 1장 27절이 우리 부부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에게 고아를 돌보며 가정을 제공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는 성경 전체가 입양에 대해 가르치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즉 우리 자신이 약하고 추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될 수 있는 길이 주어졌다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었다(롬 5:6-11). 그렇기에 우리 부부가 딸아이를 입양한 일은 그저 우리를 향해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당신도 입양 교리를 한번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면 그 교리가 얼마나 달콤한 진리인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혹 언젠가는 고아를 입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처럼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입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의 삶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Adoption: The Sweetest Doctrine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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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aron Menikoff

아론 메니코프는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는 조지아주 아틀란타에 위치한 Mt. Vernon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다. 대표 저서로 'Politics and Piety'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