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가 중심이 되는 주일을 위하여
by Jeff Robinson2021-07-04

설교는 성령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영광스러운 수단이며, 주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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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설교(preaching)를 왜 “미련한 것”이라 칭했는지 늘 궁금했다. 설교는 성령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영광스러운 수단이며, 주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도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것을 일컬어 미련하다 했을까? 


근 이십 년 설교를 해온 지금에야 설교에 대한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바울이 “전도(preaching)의 미련한 것”이라 한 것은 세상이 설교를 정확하게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인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정작 놀랄 일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설교를 그런 식으로, 즉 외면하고 싶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해왔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 제도에 대한 수 세기에 걸친 싸움 이후에 설교를 기독교 예배의 핵심적 위치로 회복시켰다. 그런데 요즘은 드라마, 스토리텔링, 음악, 인터뷰, 예술, 영상이나 기타 테크놀로지, 심지어 성만찬 등으로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대신하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왜일까?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스크루테이프(Screwtape)가 조카 웜우드(Wormwood)에게 어떻게 하면 신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기가 막힌 방법을 말해주는 부분을 보면, 작가인 C. S. 루이스(C. S. Lewis)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방법은 ‘지루함에 대한 사람들의 경향을 이용해 그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늘 똑같은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이용해라.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경향은 우리가 인간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가장 쓸만한 감정 중의 하나지. 바로 이것 때문에 이단적인 종교들이 출현하고, 결혼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우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거란다 … 우리가 먹는 즐거움을 집어내어 과장시키면 사람들이 폭식을 시작하듯이, 변화가 주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우리가 골라내어 그걸 왜곡시키면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만 갈구하게 되어있지.”


그리스도인들은 싫증을 잘 낸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사는, 어떤 면에 있어, 신학이나 방법론에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움직임과 ‘정통주의’가 신자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쟁투하는 것에 관한 내러티브이다. 그리고 너무도 자주, 이같은 사악한 사단의 장난은 선포된 말씀을 방해한다.    


사람들은 매주 삼십 분에서 한 시간 가량, 한 사람이 회중 앞에 서서 성경을 강해하는 것으로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에 바울이 말한 미련함이 숨어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에 푹 잠긴 강해 설교를 지속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죄인들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다. 


설교가 주일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1. 성경은 설교와 설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이며, 성경을 과감하게 증거하는 행위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믿어왔듯, 교회를 규정하는 원칙이 성경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주일 오전이 설교 중심적이 되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이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긴 두 편의 권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펴고 그것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에스라가 모인 회중 앞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쳤을 때 그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느 8:6). 하나님의 말씀은 경배를 일으킨다. 


예수께서 행하신 마태복음 5–7장 말씀도 설교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토해 낸 사자후 같은 설교 역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가 복음의 선포를 통해 태어났음을 기록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설교자들을 향한 시대를 초월하는 권면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였다(딤후 4:2).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교회와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설교의 중요성을 잘 요약했다. 성경은 설교와 설교자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뤄야 할 진짜 질문은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이다.  


2. 선포된 말씀은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도구이다 


선포된 말씀은 성령의 일하심과 연합하여 능력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육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물은 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17절) 답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가? 연약한 질그릇인 설교자의 입술을 통한 설교라는 미련함을 통해서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에스겔 37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생기를 돋우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여 그들을 살리라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그리고 그 뼈들은 즉각 서로 연결된다. 여전히 생기가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전에는 죽음 뿐이었던 곳에 생명을 살리고 거룩케 하는 생기를 가져온다.


또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흥의 도구였다. 종교개혁은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을 ‘회복’한 것이지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제롬(Jerome), 어거스틴(Augustine),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같은 걸출한 설교자들을 배출했다. 이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존 웨슬리(John Wesley)를 위시하여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다른 많은 설교자들을 사용하셔서 두 번에 걸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다.


기술 발전에 의해, 다른 것들로 설교를 대신하려는 시도는 계속 증가해가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술은 복음 선포를 보조하는 역할이었지 그것을 대체했던 적은 없었다. 구텐베르그(Gutenberg)의 인쇄기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대규모 부흥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디오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이를 통해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설교를 우리의 거실로까지 가지고 왔다. 인터넷에는 각종 설교와 교육 자료들이 넘쳐난다. 하나님께서 이 자료들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건강한 교리에 대한 열정을 일으키시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설교는 여전히 기독교 예배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기술은 언제나 변화한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맞춰가기 위해” 설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우리의 예배 역시 필연적으로 언제나 변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변하는 것을 금한다.


3. 교회의 내세적 본질은 설교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은 결코 교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일마다 교회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 인종, 지역, 국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흑인, 백인, 아시아인, 남미인, 부자, 빈자, 몸집이 큰 이, 작은 이, 운동을 잘 하는 이, 못하는 이, 도시 출신, 시골 출신, 도시 근교 출신 등이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의 내용이 선포되는 것을 듣기 위해 교회에 모인다. 하나님의 모든 “통상적인” 은혜의 수단은 이 시대 문화에 대항적이다. 설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설교 역시 대항(對抗)문화적으로 디자인하셨다.


드라마, 동영상, 토론, 음악 등의 것으로 설교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와 교회가 하는 일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를 그의 교회로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신다. 통계를 보면 미국 성인은 평균적으로 하루 열 시간 미디어를 사용한다. 교회까지 이런 일에 뛰어들어야 할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일주 168시간 중 주일 두 시간이라도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강권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


진정한 예배는,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든 간에, 인간이 만든 어떠한 것으로도 흉내내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인 문화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언어적이다. 시각이 언어를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전하라


설교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는 이들 역시 좋은 뜻으로 그리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은 말씀 중심적이라기보다 회중 중심적으로 들린다. 설교는 구식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 즉, 죄와 옛 자아로부터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선호하는 것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설교자를 더 매끈하게 말하고 최신 기술과 유행에도 민감한 의사소통 전문가들로 바꿔야 한다거나, 아니면 더 괜찮고 더 카리스마 있는 설교자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함이라는 예상치 못한 통로를 통해 흘러나온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고후 12:10).


스크루테이프가 조카에게 말했듯,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늘 똑같이 반복되는 것들을 지나치게 싫어한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표식을 구했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죄인들에게는 정직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가 언제나 필요하다. 성경 역시 이것이 회집된 교회를 위해 가장 우선되는 것이라 가르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왜 다른 것을 주려 하는가?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ase for Sermon-Centric Sundays

번역: 이정훈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에 푹 잠긴 강해 설교를 지속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죄인들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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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Jeff Robinson

제프 로빈슨은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고, 현재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섬기고 있다.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Christ Fellowship Church의 부목사이며, Andrew Fuller Center for Baptist Studies의 연구교수이며, Southern Seminary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겸임교수이다. 목회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약 20년 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공저서로 한국어로 번역된 '천국 묵상'과 'To the Ends of the Earth: Calvin’s Mission Vision and Legacy'와 '15 Things Seminary Couldn’t Teach M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