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와 바울의 모순 들여다보기
by Chris Bruno2020-02-05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구절을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성경 속 난제 중 하나는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다.

- 바울: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3:28).
- 야고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약 2:24).

성경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놓고 한 번쯤은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종교 개혁 논쟁 중에도 일부는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과 하나님의 권위로 된 책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두 사도간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

야고보서 2장 24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는다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야고보가 로마서 3장 28절 또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로 그 “믿음”을 여기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는 정말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구절을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만으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맥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이 무슨 의미인지 19절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 귀신들은 일명 쉐마(Shema)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이 말하는 바를 믿고 있다. 귀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이고 진정한 신이며, 그가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워서 떨고 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진리가 가져다줄 결과 때문에 감정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 사례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설명한다. 이 사례야말로 야고보와 바울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서로 같은 말을 하지만 단지 믿음의 측면에 관해 다른 강조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러나 이 두 저자가 고려하고 있는 아브라함 인생의 시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그 시점에 서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든,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순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 사건은 창세기 15장 시점보다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 정도였다(창 12:4). 그리고 창세기 15장은 12장의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그 이후 수년간,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기 전까지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갔을 때 이삭은 아마도 십 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37살이 되었을 때라고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삭이 제사에 필요한 나무를 지고 산 정상까지 갈 정도로 컸다는 것은 알 수 있다(굳맨Goodman, 130-131).

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할 때,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야고보는 바로 이런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약 2:23).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 아브라함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상태(status)는 믿음만으로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게 야고보서 2장 21절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행위의 역할은 믿음의 역할과 다르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 즉 의로운 상태를 부여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의로운 상태는 그가 행하는 신실한 행위로 완성되어야 한다.

진정한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변화(transformation)를 가지고 온다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믿음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거기에 따른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 이상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그 약속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궁극적으로 선한 행실과 분리될 수 없다.

바울과 다른가?

야고보는 소위 말하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이 바울이 로마서 3-4장과 갈라디아서 2-3장,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인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행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한다. “율법의 공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관계없이,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들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믿음으로 하는 선한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그는 거기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다.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창세기 15장으로 되돌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목한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창세기 15장에서 시작해 그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 시점 이후 그의 생애를 바라보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썼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커갈수록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견고하여졌다. 이 말은 당연히 거룩함과 선한 행실이 더 많아졌다는 것으로 들린다.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순종은 당연한 것이다(롬 6:1-14 참조).

야고보가 우리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말하는 믿음, 그러니까 의롭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율법의 공로”와 관계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했을 때, 그는 결코 야고보가 말한 그런 선한 행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말씀을 이처럼 적절한 문맥 속에서 이해할 때, 야고보는 결코 바울과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강조점을 다르게 하여 적절하게 보완하고 있다.



원제: Does James Really Contradict Paul?
번역: 무제
 

야고보가 우리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말하는 믿음, 그러니까 의롭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율법의 공로”와 관계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했을 때, 그는 결코 야고보가 말한 그런 선한 행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Share this story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Chris Bruno

크리스 부루노는 Wheaton College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는 Bethlehem College & Seminary의 신약학 부교수이자 부학장이다. 저서로는 '16단어로 꿰뚫는 성경'과 'Paul vs. Jame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