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by Sam Allberry2020-02-01

1966년 영국은 풋볼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장 바비 모어(Bobby Moore)는 웸블리 스타디움 연단으로 올라가 여왕으로부터 트로피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후 그 역사적인 순간에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모어는 겁에 질렸었노라고 답했다. 여왕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모어는 경기로 인해 지저분해진 손으로 여왕과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며 미친 듯이 바지에 손을 비비며 닦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더러워졌던 경험이 있다. 물론 더러워진다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 내면도 더러움을 느낄 수 있다.


더러운 것 같은 느낌


마가복음에는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한 사람이 나온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나신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는 부정한 자였다. 나병은 특히 끔찍한 병이다. 불치병이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병 환자들은, 나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야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전염병자 취급을 받았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자신에게 독성이 있고 방사능을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당신 자신이 마치 전염병 같은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과거에 한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맥베스(Macbeth)에서 맥베스 부인은 던컨(Duncan) 왕을 암살하라고 부추겼다. 그것이 그녀의 양심을 짓눌렀고 자면서도 손을 비비며 핏자국을 지우려 했다. 그녀는 “이 손은 정녕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는가!”라며 울부짖었다. 셰익스피어는 죄책감에 눌린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성폭력으로 인한 더러움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만 더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른 이가 행한 악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어느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그 일을 왜 입 밖에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에 그 사건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공격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난 파티에 초대받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주차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이나 할 만한 여자인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봐야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뻔했어요. 가해자의 범죄를 드러내는 데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말이죠.


성폭력으로 인해 이 여성은 그 가해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


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의 나병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율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회복시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하시면”이라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고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경험한 어려움을 예수님은 아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기피 하여 뒷걸음질 치지 않으신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그를 만지신다. 아마도 십수 년 넘게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나병 환자처럼 그에게 나오는 자들의 부정함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혐오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로부터 멀리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신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예수께서 ‘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놀랍기까지 하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2).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은혜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위험한 존재이거나 전염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가 아닌 나병을 문제의 요인으로 보셨다.


아무리 더러운 흙이 묻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해도 예수님의 정결함은 훨씬 더 강력하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의 불의를 능가하는 의가 있고, 우리의 범죄를 능가하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의 죄를 넘어서는 용서가 있다. 우리의 최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선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더럽힐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뿐이다. 우리의 더러움의 농도가 아무리 진하다고 해도 그분의 거룩함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력하다. 그분이 지우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내 악함이 너무 커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자조(自嘲)적인 생각을 사람들은 겸손이라 착각한다. 사실 그것은 교만이다. ‘내가 너무도 대단한 사람이어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보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


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엄히 경고하시며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사장에게만 보여서 깨끗해졌음을 입증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신다. 아직은 예수께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행동하여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예수님과 그 나병 환자가 서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이전에는 나병 환자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진 곳에서만 살았다. 이제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깥 한적한 곳으로 가셔야 했다.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더러움을 제거하시는가?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와 당신의 더러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모든 죄, 모든 상처, 모든 깨어짐과 더러움을 그가 짊어지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버림당하셨다.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말이다 (막 15:34). 그는 독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고, 나는 향기를 내게 되었다. 그가 밖으로 쫓겨났기에 내가 안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는 더러움을 ‘느끼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참소하는 자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사단은 영원히 사단이다. 하지만 죄와 더러움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피할 곳이 있다.


바비 모어는 바지에 손을 계속 문질렀지만 더러운 손을 완전히 깨끗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더러운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tains That No One Sees: How Jesus Removes Our Shame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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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am Allberry

샘 올베리는 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의 국제 강사로 섬기며 미국 TGC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Is God Anti-Gay?'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