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by Dan Dodds2020-01-14


중세 시대에 로마가톨릭이 점점 타락하면서 교회는 미심쩍은 교리들을 공표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와 말씀이 갖는 이중적인 권위에 대한 교리였다. 물론 교회와 말씀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로마 교회가 자신의 판단대로 우선적인 권위를 차지했다. 이렇듯 로마가톨릭은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최종적인 발언권을 거머쥐었다.


바로 이 말씀 해석에 대한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교회가 종교개혁자들이 비판하고자 한 주요 대상이었다. 그들의 비판은 오직 성경을 의미하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라는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자가 충돌할 때는,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로마 교회에 상반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즉 신자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매여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1521년 보름스 의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진술한 루터의 답변 속에 잘 묻어나 있다.


“저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이 아닌, 교황이나 의회에 설득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펴 왔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행위는 올바르지도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고, 저의 입장을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바로 이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칙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가 주어진다. 이 교리는 하나님 백성의 양심을 속박하려는 어떠한 사람이나 기관의 불법적인 권위도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 교리에 의하면, 성경이 (혹은 성경에서 합법적으로 도출된 진리가) 특정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유롭게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으며, 이때 그 양심은 누구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의 권위나 견해가 그리스도인을 억압할 수 없다.


이렇게 신앙의 본질과 관련 없는 자유의 영역에 대해 신학자들은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 용어는 헬라어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아’와 판별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디아포라’가 합성된 개념이다. 그 두 가지 의미가 결합된 아디아포라는 판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결국 성경이 아무런 도덕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선호에 따라 자유로운 입장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는 게 아디아포라의 적용이다.


바로 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교리는 종교개혁 당시에 중요한 논제로 취급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교리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까지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왜 종교개혁자들이 그 문제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을까? 칼빈이 그 답변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흔히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이 일단 함정에 걸려들면 길고 복잡한 미로에 빠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아마포를 가지고 시트나 셔츠나 손수건 또는 냅킨에 사용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는 곧 대마포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마음을 갖게 되고, 결국에는 삼베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의심에 빠진 자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만 보이게 마련이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7절).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를 마치 보편적으로 그릇된 행위처럼 규정하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그 행위를 억제한다면, 그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멈춰 세울 수 없는 미끄러운 비탈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이런 태도가 율법주의 한 형태이다. 그와 같은 율법주의는 자유와 동떨어진 율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신자의 양심은 억압되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는 자세


그처럼 사람이 만든 율법이 교회 안에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섬기는 교회의 경우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제목이 달린 과정을 새가족반에 첨가했다. 현재 이 과정에는 스물다섯 개가 넘는 주의 사항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관심사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다른 신자의 양심을 억압하려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마련되었다.


그런데 간혹 그런 일이 발생하듯, 우리는 이편에 있는 도랑을 피하려고 방향을 바꾸다가 저편에 있는 도랑에 빠지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그 교리를 오해하며 부주의하게 다루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잘못을 예방하고자 다음과 같이 교훈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에 베드로도 동일한 원칙을 제시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이렇듯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죄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로마서 14장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이 소개된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듯이, 초대교회 당시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가 이슈였다.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이에 바울은 두 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이는 우리가 숙고해야 할 내용으로서 다음 한 구절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먼저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정도로) 믿음이 강한 형제가 (그런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업신여기는 교만을 범하지 못하도록 경계시킨다. 그러면서 또한 음식을 먹지 않는 자에게도 음식을 먹는 자를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죄로 규정하지 않으신 행동을 죄로 여기며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 한다]”(롬 14:19).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섬기는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자유를 과시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 자유를 사용하는 자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불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여러 모양새로 실천하되, 다른 지체를 판단하기보다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마 7:1; 롬 14:22-23).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Christian Liberty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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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an Dodds

덴 도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위치한 Woodruff Road Presbyterian Church의 장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