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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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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Collin Hansen  /  작성일 2020-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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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arah Brown on Unsplash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사망 기사가 나지도 않았다. 조의를 표하는 어떤 소식도 TV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다.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견한 이들도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막지는 못했다. 사망의 조짐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DNA를 통해 나타난 바가 있었다.


당신이 교회의 목회자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망 소식을 놓쳤을지 모른다. 물론 수많은 언론인과 문화 평론가 또는 미래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이 시대에 크게 성공할 상품인 양 선전해 왔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 예견해 왔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격을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견뎌 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11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례식이 열렸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그 양식과 전복의 역사, 1970-1990년”(Postmodernism: Style and Subversion 1970-1990)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판단 기준의 부재


흔히 기독교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마치 철학과 윤리 분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혁명적인 사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선 모더니즘이 신뢰한 확실성에 반발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종의 대안 정신으로서 처음부터 흔들리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선택적으로만 각 분야에 적용되어 왔다. 그러면서 모더니즘을 초월한 형태로 자주 표현될 뿐 그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사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서 등장한 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예술과 문학에 뿌리내린 포스트모던 학파 역시 모더니즘 관습에 대한 산발적인 항변을 나타낼 뿐이었다. 런던 전시회의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 모더니즘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는 창문과 같았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깨진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열이 생긴 여러 조각의 유리 표면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지침은 복잡성과 자기모순에 있다.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에서 90년에 이르는 이십여 년 동안 그 스스로가 애초에 해체하고자 했던 돈과 권력의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시즘과 같은 근대 사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인간의 동기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 모든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묘사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세대는 병원을 방문할 때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는 이상하게도 모던 세대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 실제로 가족 간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게 마련인데, 모더니즘과 그 방탕한 아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 아들은 돈과 권력에 탐욕을 낸 아버지처럼 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지만, 세월이 흘러 거울을 보고는 그 빼닮은 모습에 놀라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에드워즈 독스(Edwards Docx)는 ‘프로스펙트’(Prospect) 매거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락하며 소비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 아티클에서 그는 저자의 의도에 대한 반발로 문학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 경향을 설명했는데,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발언에 문을 열며 일부 계층에 자유를 허락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움직임이 결국에는 반지성적인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게 된 서구 자본주의는 잠시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이러니한 전술로 인해 도전에 직면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원체 모든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혼란과 불확실성의 기류도 함께 자라며 번성하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의 신조와 기술 또는 미학에 대한 확신도 결핍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어 누구도 스스로 안심하거나,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떤 대상의 진위를 가리거나 판별할 수 있는 방도가 정책적으로 마련되지도 않았다. 아무런 미학적 기준이 없다 보니,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역설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한 예로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를 쓴 댄 브라운(Dan Brown)을 들 수 있다. 그는 학회에서 자신에게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치 학자처럼 행세하며 진리를 오용함으로써 그릇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런 전제는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 또 그는 신뢰할 만한 학계의 표준적인 견해는 무시한 채, 이단적인 사설을 마치 교회의 정통적인 입장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럼 끌어올려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저급한 추리 소설을 대중 시장에 내놓았고, 많은 사람이 진정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당연하다. 시장은 상품의 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언제든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에드워즈 독스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탈포스트모던 세대(post-postmoderns)가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도한 소비 행태와 거짓을 진짜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그리고 각종 소셜 미디어를 채우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중략] 포스트모던 세대는 모던 세대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면, 현세대가 느끼는 문제는 그와 정반대이다. 즉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가 시대에 적응한다는 명목하에 쓸데없는 시도를 하며 적실성만 추구한다면, 현세대에게 정작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다. 그 다음에 어떤 사조가 몰려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을지 몰라도, 그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판단 기준의 실재


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지난 수십 년간 시대정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필요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이점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우리의 죄악 된 확신 내지는 교만을 점검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내포된 지혜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덕분에, 더 이상 계시와 분리된 이성만으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식의 계몽주의 사상은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인간의 탐구가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는 에드워즈 독스의 아티클에 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계속 들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속한 문화와 역사에 따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진리를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권력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해치고 말았다. 거기에는 진리와 정의와 권위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할지를 알려 준다. 교회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문화적 흐름에 대응하도록 가르치는지를 놓칠 때가 있다.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해 보겠다. 먼저 본디오 빌라도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들으며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진리이신 그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요 18: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듣는 귀를 주셔야만 진리를 증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요 18:37).


다음으로 솔로몬은 돈과 권력을 다 거머쥐고 쾌락을 마음대로 누렸으면서도 인생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원론자처럼 외부로부터 새로운 신들을 다 받아들였다(왕상 11:1-8).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는 마치 에드워즈 독스의 탄식과 같이 들린다. 전도서는 그 결론부에서 신뢰할 만한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우리가 속한 문화적 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죽었지만, 그 정신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보편적 절망감을 반영하는 한, 여전히 우리 곁에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그분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와 정의, 권위의 근원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체하게 될 정신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공허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바로 그분께 속한 권위 외에는 다른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만이 거룩한 공의가 실현된 아름다운 역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죽음’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위한 영원한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콜린 한슨(Collin Hansen)은 TGC의 편집장으로 섬기고 있다. Young, Reformed: A Journalist's Journey With The Calvinists를 포함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저널리즘과 역사로 학사 학위를 받고,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Postmodernism: Dead But Not Gone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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