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요구되는 남성적 리더십
by Greg Morse2020-01-07

남성성(masculinity)에 관해 가르치는 목록에 힘, 주도성, 열정, 용기와 같은 자질이 포함되는가? 우리가 교회 사무실에서 일할 남자를 평가할 때, 그리고 소그룹 지도자와 경건한 멘토를 찾을 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융통성있는 남자, 양을 보호하고 기꺼이 늑대와 싸울 수 있는 선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

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고, 정복하고,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성의 힘, 용기, 열심 및 주도성을 높이 평가하는가? 그럼 강하기 때문에 온화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는 강하기 때문에 온화함을 보일 수 있다.

지금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라는 아슬란의 설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종(species)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생각은 남자를 안전하게 하는 데에 선함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선함과 상관없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로 중생한 남자는 상대가 불편해할 말은 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며, 주도적인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강요가 없다면 신념 없고, 열정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남자를 만든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중생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로움으로 훈련받은 남자의 경건함은 그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본성을 잃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더함으로써 성숙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친절, 자제심, 동정심은 그의 힘, 용기, 결단력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온화하고 강한 남자는 세상에 역설을 제시한다. 그의 손은 집을 짓고, 아들과 씨름하고, 딸들과는 차를 마신다. 그리고 칼자루를 들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운다(엡 6:10-20). 그는 갑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경건한 전사이다. 용기 있으면서 온유하고 선한 사람이다. 다음에 나오는 남자에 대한 묘사도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신은 홀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음식을 먹었던 가장 온유한 남자였다. 당신은 모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으로 적에게는 가장 무서운 장수이자 가장 용감한 기사였다.”_‘아서왕의 죽음’(Le Morte D’Arthur)

우리는 남자의 성품을 강인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나눌 때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 사회는 점차 부드러운 남자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강인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남자를 특별한 인종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적극적으로 찾는 남자.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의 남자.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더 높은 가치를 얻기 위해 전진하는 남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남자.

잊지 말자. 미지근한 종교는 미지근한 남성상을 만든다. 그리고 미지근한 남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교회를 지나쳐서 이슬람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또는 단순히 ESPN(미국 스포츠 방송-역주)을 지나 파괴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죽어가는 남성의 불꽃

경건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 나타나는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을 느낄지가 궁금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래전 남자의 모습을 버려야 할 것인가? 방황하는 아브라함, 씨름하는 야곱, 싸우는 여호수아, 이방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엘리야, 융통성 없는 다니엘, 거칠게 말하는 세례 요한, 주도적인 바울과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는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못 되었다고 꾸짖어야 하는가?

우리는 경건이 주는 불편함보다 친절함이 주는 편리함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 아버지, 남편, 교회 가는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한 남자가 잠들어있다”라는 비석 아래에 언젠가 내가 누워있지 않을까 두렵다.

“나이스하다는 것”은 아픈 허리에 대해서,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 용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의로움과 바른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나이스하기 위해서 굳이 용기를 낼 필요도 없고, 특별한 신념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악한 자를 상대로 굳이 원수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적당하게 맞춰주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이제 우리는 길을 벗어난 것 같은 오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또 다른 도랑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만족하며 남자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한 힘과 자기희생을 통해 더 나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불길이 타오르는 남자

회복을 위한 한 단계는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타협하지 않는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질투심이다. 우리는 거룩한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과 확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출 20:5). 그는 자신의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와 같은 거룩한 질투심으로 붙 타오르도록 남자를 창조했다. 이런 남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불타는 남자는 반드시 현재의 고착상태를 부수어 버릴 것이다. 문화적인 수용과 세속적인 민감함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은 성경이 말하는 남성다움을 연마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거룩한 질투심은 남자를 변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향해, 육체의 정욕을 향해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 투쟁하게 한다.

모세를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민 12:3). 그는 백성의 우상숭배에 분노해 십계명 돌판을 부쉈고, 황금송아지를 녹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출 32:20).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거인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시를 쓰는 목자 다윗은 또 어떤가(삼상 17:2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흑인”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던 아프리카인 비느하스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졌던 그는 심각한 죄를 짓고 있던 두 명을 창으로 꿰뚫어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다(민 25:6-13).

엘리야를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며 그는 괴로워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 대결을 요구했고, 우상에게 절하는 그들을 몇 시간에 걸쳐서 조롱했다(왕상 18:20-40).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것을 원했다.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어떤가?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대신 온 도시가 우상을 섬기는 모습에 자극을 받았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와 지도자들에게 도전했다(행 17:16). 그는 사람들이 놀리고 반대하고 때려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 사역을 위해서 살았다.

왕의 모든 남자들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는 채찍을 들었고 거칠게 말했으며, 무기를 손에 들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함께 노는 유다의 사자이다(막 10:14). 또한 그의 분노를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을 할 정도로 무서운 어린 양이기도 하다(계 6:16).

그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고후 10:5), 용의 대가리를 부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사 42:3). 그는 갈보리로 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도둑과 쓰레기들과 함께 죽으려는 나이스한 마음으로 간 게 아니라 그의 신부, 그의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그 자신의 영광을 향한 불타는 정열 때문에 갈보리로 갔다(요 17:4; 롬 3:25-26; 벧전 3:18).

스펄전 목사가 강단에서 한 마지막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대장 중의 대장이다. 선택한 왕자 중에 그분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부는 언덕의 가장 황량한 쪽에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의 가장 무거운 끝은 그의 어깨에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짐을 지라고 명령할 때 자신도 함께 짐을 진다. 자애롭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에 화려하고 풍성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항상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스펄전: 설교의 황태자')"

왕의 남자는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음으로, 어떤 것에도 열정을 키우지 않음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 않음으로, 믿음의 요새를 세우지 않음으로, 어떤 영적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음으로, 짐을 지지 않음으로, 정복하지 않은 언덕 위에 깃발을 꽂지 않음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왕의 남자는 악의 세력에 맞서 거품 칼을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치열한 전투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나님 안에서 위험한 남자는 주위를 향한 책임을 지고, 내가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질 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곰이 공격할지라도 가만히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온유하지만 치열하다. 거칠지만 부드럽다. 리더지만 섬긴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다.

바로 예수님과 같은 남자이다.



원제: Not Safe, But Good: The Men We Desperately Need Today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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