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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이중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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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y Justin Taylor  /  작성일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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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Fredrick Suwandi on Unsplash

예수님을 윤리적인 모순이나 신학적인 딜레마에 빠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요 18:36). 틀림없이 그분의 나라는 장차 다가올 시대에 속해 있었지만, 동시에 현시대 곧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나라는 가정이나 국가와 같이 현시대를 이루는 인간 사회의 조직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누가복음 20장에서 사두개인들은 과부가 되었다가 재혼한 여성의 경우 부활 시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매우 실험적인 질문을 던지며 가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느니라]”(눅 20:34-35). 즉 가정은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


또 유대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으냐며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시며 누구의 형상과 글귀가 거기에 새겨져 있는지를 도로 물으셨다. 이에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눅 20:24), 예수님은 이 같은 결론을 내리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 이처럼 도전적인 방식으로 예수님은 가이사가 지닌 권위를 제한하시고 하나님이 지니신 무한한 권위는 그들 앞에 드러내셨다. 곧 데나리온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면, 모든 인간 존재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께 우리 모두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국가 역시 이 땅에서 지속되는 제도에 속할 뿐, 장차 다가올 나라는 그와는 다른 원리로 운영된다는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주후 5세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대작을 저술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대조하며 자신의 정치학적 견해를 선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어거스틴을 오해하며, 그가 물질적인 영역인 지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도성을 이야기하고 그와 상반되는 의미로 천상에서의 생활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도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에 모두 속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고 만다. 이와 달리 어거스틴은 하늘과 땅이라는 대립된 비전을 제시하며, 서로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두 공동체 또는 두 무리에 관해 이야기한다(참고로 이와 같은 두 도성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역사 가운데 공존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인간의 도성은 창조가 아니라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도성의 욕망과 관심사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심하게 왜곡되어 있으며, 성령이 아닌 육신의 기준을 따라 표출된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는 구속받은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을 최고의 선으로 추구하며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도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도성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패러다임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히 13:14),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게 된다(히 11:10). 이 땅에서 영원한 집을 소유하지 않은 “거류민과 나그네”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벧전 2:11).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도 하다(렘 29:7).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이 세상에 속한’(of the world)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일꾼으로서 ‘이 세상 속으로’(into the world) 보냄 받아 ‘이 세상 속에’(in the world)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요 17:15-16; 고전 5:9-10).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을 본받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기를 추구하며(롬 12:2)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도록 우리 자신을 지킨다(약 1:27).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를 둘러싼 세상 문화 속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부패함을 막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마 5:13-16; 빌 2:15).


두 가지 시민권


성경에서 현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타포 중 하나가 시민권이다. 시민권이란 공인된 법적 지위로서 누군가에게 부여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말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인 도시(또는 국가)에서 활동하는 각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가 포함된다. 따라서 군주제로 세워진 왕국의 백성과는 다르게, 시민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바지한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의 개념을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간수가 상관의 명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조용히 풀어 주려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분개했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 그리고 사도행전 22장에서는 천부장의 명을 듣고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백부장을 향해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한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행 22:25).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시민권자였다고 밝힌다(행 22:28). 이러한 에피소드에서 로마 당국자들이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들이 로마 시민이 가진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였기 때문이다(행 21:38-39; 22:29).


아마도 바울은 가족의 내력을 통해 처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에 그는 또 다른 시민권을 얻게 된다. 바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밝힌 시민권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8:36).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그 가족으로 입양될 때,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 새로운 왕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곧 “흑암의 권세에서 [중략]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골 1:13).


이중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법


이처럼 우리에게는 이중 시민권이 있는데, 그 권리를 바르게 행사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래의 네 가지 사항을 명심해야 한다.


1. 하나님이 범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이 세상을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시더라도 그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다(마 28:18). 그런데 이 세상은 여전히 타락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시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정이나 국가를 비롯한 창조 세계의 제도를 포함하여) 세상의 일시적인 질서를 다스리신다. 예를 들어 세상의 정부를 통해서는 공권력과 법적 구속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세우는 일을 하신다면, 교회를 통해서는 복음의 선포와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키신다.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2. 지상의 시민권이 영원하지 않다고 해서 그 시민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시적인 것들도 중요한 변화를 일으켜 낼 수 있다. 가령 바울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거론하며 당국자들에게 호소하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이 땅의 권리를 중요한 일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 그의 시민권은 생사에 영향을 미칠 만큼 큰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물론 누군가의 일시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보다 그의 영혼이 구원받도록 전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게 하는 일이 잠시 지나가는 현세에서의 고통을 줄이는 일보다 우선적인 사명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은 복음 전도와 시민으로서의 역할 사이에 양자택일을 하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도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를 제자의 삶으로 부르셨는데, 그 제자도란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그분이 분부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며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 28:19-20).


3. 하나님이 일반 은혜 가운데 허락하신 정부를 포함하여 그분이 주시는 모든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세상 나라들이 분개하는 현실을 보며(시 2편), 절망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국가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지상의 통치자를 세우셨다(롬 13:1-4).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악하든 그 직분에 있는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롬 13:7). 이런 차원에서 정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악한 일은 억제하고 선한 일은 도모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기관이 정부이다(롬 13:2-4). 그러므로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는 정부가 올바른 기능을 하여 우리가 고요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딤전 2:2).


4. 우리가 지닌 하늘의 시민권을 공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상에서 사용하시는 수단에 참여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가 소유한 하늘의 시민권을 볼 수 없다. 이 시민권은 지상의 정부가 인식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우리의 시민권이 공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방식을 정하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즉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분의 백성이 함께 모여 구성한 예배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즉 하늘의 시민들로 하여금 지상의 교회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하신 왕의 성품을 반영하며 그분을 예배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함께 예배하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며 하나님 나라의 최전방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맡은 공적 역할을 수행한다.


분명 우리의 인생에는 정치 체제라든가 시민 활동보다 중요한 일들이 더 많음에도, 때로는 그와 같은 활동에 과도히 헌신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수준 이상으로 삶의 정체성을 거기에 둠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지상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이행해야 할 의무나 참여를 소홀히 하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도 않은 영적인 이유까지 들며 우리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 양극단의 자세 가운데 우리가 어느 쪽으로 쉽게 기울어지든,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시민권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무엇보다도 복음에 의해 빚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다가올 나라를 기다리며 그 나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의 공적 유익을 위해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Living as Dual Citizens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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