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받는 이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말들
by Gavin Ortlund2019-11-01

성경의 모든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롯은 선지자의 머리를 베었고, 유다는 스승을 배신했지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성경 구절로 친구 욥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욥이 실제로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욥기 1-2장에 간단하게 나오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35장에 걸쳐서 계속 이어진다. 나는 어느 것이 욥을 더 괴롭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처음에 겪은 상실의 고통일까 아니면 나중에 이어지는 위로하러 온 친구들의 추궁일까? 


욥의 위로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욥과 대화를 할 때 지배적으로 사용한 그들의 도덕적 세계관이 문제이다. 그리고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추론하는 방식으로 찾아내도록 욥에게 강요하는 점이 문제이다.


욥의 친구들을 비판하기 쉽지만 솔직해 보자. 우리는 모두 그들과 같을 수 있다. 사실, 욥과 같이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으면, 복음을 지지하던 우리의 마음도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로 테스트하듯이 반응한다. 우리가 은혜를 믿든지 인과응보의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고난은, 우리가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며 평소 적용해 온 신학을 겉으로 드러나게 한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특별히 네 가지 방식으로 조언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 네 가지 방식은, 욥의 친구들처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식으로 이미 잿더미에 앉아 있는 이들의 머리 위에 불이 붙은 석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언급함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롬 8:28),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창 50:20)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의 상황에 항상 알맞거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은 고난을 당하고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이 그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셨다고 말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다. 요셉의 분노와 좌절감을 상상해 보라. 그의 형들이 우물가에 모여 용기를 북돋우며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신다”라고 소리치는 말을 음침한 우물 바닥에서 듣고 있을 요셉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까를 짐작해 보라.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가르친 후에 얼마 안 되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고 조언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을 확실히 실천해 보자.


2.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로 시작함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 자신의 경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목으로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숙을 나타내는 한 가지 표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보려 하지 않고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알기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이유로,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할 때 중요하다.  


첫 번째로, 각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다 다르다. 우리 집이 불타서 무너져 내린 후에 하나님이 더 좋은 집을 주셨을 수도 있고, 친구의 배신으로 우리가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락하고 혼동스런 세상에서, 당신이 고난받은 후 경험한 그런 좋은 일이 현재 고난당하고 있는 당신의 친구에게는 죽을 때까지 전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슬픔은 천국에 갈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네가 이 일로 즐거워하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친구의 현재 상황이나 미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두 번째로, 우리의 이야기가 유사하더라도,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가 그 이야기를 지금 당장 들어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의 것과 유사하여,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친구가 원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나의 이야기와 비교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와 미세하게 다른 점을 인지하며 친구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3. 고난을 초래한 잘못을 최소화함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인과응보적으로 접근하려는 본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의미로 그렇게 했을 거야” 혹은 “그것이 그렇게 나쁘겠어?” 아니면 “글쎄, 모든 갈등에는 양쪽에 잘못이 있는 거지”와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진실은 누군가가 정말로 좋은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이 좋은 의미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나빴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잘못이 항상 양쪽에 똑같은 비중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잘못의 비중이 80/20, 때로 100/0처럼 일방적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인 듯하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에게 고난을 초래한 사람들의 죄를 최소화하지 말라. 변명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사악함을 정직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가볍게 해 주는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4.위로와 자비를 무시한 채 품성 형성을 강조함


신약 성경이 고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경건한 품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는 점이다(참조, 롬 5:3-5; 약 1:2-4). 그러나, 누군가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일 때에는, 아마도 이 점을 강조할 때가 아닐 것이다. 신뢰 관계가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 점이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위로와 자비의 말과 함께 균형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극심한 고난의 경우, 아예 어떤 말도 하지 말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엘리바스가 본능적으로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2)라고 하듯이, 우리도 뭔가를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는 친구는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나 견해보다는 우리의 사랑과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풀어 주거나 혹은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고통 중에 있는 그들과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 어둠에 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에서 그 순간에, 그 공간에서, 그 고통을 그들과 함께 견디어 보라.     


아슬란의 눈물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고난에 대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생의 삶에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으시고, 우리 삶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을 하지도 않으신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상했을 때 예수님을 가장 진실하게 발견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시 34:18).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시 147:3).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


C.S. 루이스의 나이아 연대기 시리즈 2편인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에 디고리라는 한 소년이 아슬란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아프고, 그는 아슬란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두려워한다. 루이스는 그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그때까지 그는 사자의 커다란 앞발과 그 위에 난 거대한 발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절망에 빠진 채 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본 광경은 그의 평생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그를 놀라게 했다. 굽혀진 사자의 몸과 황갈색의 얼굴은 그의 얼굴 가까이에 있었고 놀랍게도 사자의 눈에는 반짝이는 큰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이 자신의 것에 비하면 너무 크고 눈부셔서, 디고리는 순간적으로 사자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틀림없이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슬란이 말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알아. 슬픔은 위대한 거야. 이 땅에서는 너와 나만 아직 그것을 알고 있단다. 우리 서로에게 잘 하자.” 


“내가 알아”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위로의 말이 함축되어 있는지. 그리스도는 큰 고난을 받았으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자들을 공감하신다. 그는 불의의 재앙에 시달린 궁극적 욥이며, 형제들에 의해 배신을 당한 궁극적 요셉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의 심판을 온전히 받아들였으며, 지옥과 버림받음의 깊은 속으로 가라앉으셨다. 누구도 이보다 더 큰 고난을 받지 않았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러한 깊은 사랑은 고통의 순간에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욥의 친구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Not to Help a Sufferer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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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Gavin Ortlund

게빈 오트런드는 First Baptist Church of Ojai(Ojai, California)의 담임목사로 Fuller Theological Seminary(PhD)를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Theological Retrieval for EvangelicalsFinding the Right Hills to Di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