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말의 의미
by Don Carson2019-09-18

요한복음 3장 5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새로운 탄생 혹은 중생을 일컫는 ‘거듭남’에 관해 예수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그야말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거듭남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꺼내셨을 때(요 3:3), 니고데모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흔히 사람들은 니고데모가 꺼낸 이 질문을 보며, 그가 얼마나 꽉 막혔는지 예수님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그 표현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선생’(요 3:10)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사람이 그대로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사실만큼은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즉 사람은 반드시 다시 시작해야 하며, 전혀 다른 생명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다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다시 시작하며, 정말로 새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자랑하면서 그 출발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오마르 카이얌(Omar Khayyam)이 그 어려움을 다음처럼 잘 표현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기록한다 기록한 후에도 / 또 계속 움직인다 그대의 모든 경건도 지혜도 / 그 손가락을 되돌려 반 문장도 지우게 할 수 없다 / 그대의 모든 눈물로도 단 한마디도 씻어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잘못과 죄악만이라도 지워 버리면 좋겠다는 소원을 품기도 한다. 알프레드 로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은 이렇게 기록했다. “오, 내 안에 일어나는 한 사람이 있으니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더는 아니기를.” 또 다른 시인인 존 클레어(John Cl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에도 개정판이 있다면, 그 원고를 어떻게 수정할꼬.” 니고데모는 사람이 새로운 출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항해길에 오른 지가 한참이니,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엔 늦지 않았는가(요 3:4,9). 만일 그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라면, 소망은 아주 없어 보인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거듭나야 한다는 요점을 다시 강조하신다. 다만 ‘거듭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으로 확장시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신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관건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불충분한 설명들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제시되어 왔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은 그리 충분치 못한 답변으로 판명이 났다. 그중에는 예수님이 이 표현을 통해 두 가지 출생을 가르키신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즉 사람은 (물로 태어나는) 자연적인 출생뿐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데서 더 나아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1)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의 표현은 새로운 의미가 결여된 진부한 내용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표현의 첫 번째 부분(즉 ‘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이 다음과 같은 내용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는 존재해야 한다. 너는 자연적으로 출생하여 이곳에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부분(즉 ‘성령으로 나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물로 나야 한다’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2) 고대 사회에서 자연적인 출생을 가리키기 위한 어구로 ‘물로 나다’라는 표현이 사용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자연적인 출생에 앞서 자궁에 있는 양수가 터져 나오는 현상을 보고 ‘물로 나다’라는 표현을 생각해 낼 수도 있겠으나, 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 문헌이나 헬라 문헌에서 그런 의미로 이 표현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두 가지 문제를 고려해 볼 때,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또 다른 견해로서 성례적 해석이라고 불리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새로운 출생이란 물과 성령 모두와 관련되어 일어나는데 이때의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맥락에서 니고데모가 ‘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기독교의 세례 의식을 떠올릴 거라고 예상하며 예수님이 그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 않고 그 의식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실을 소개한다(요 4:2).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더 나은 설명


그렇다면 더 나은 설명이 있을까? 먼저 요한복음 3장 3절과 5절의 유사성이 잘 드러나도록 아래와 같이 배열해 보도록 하겠다.


(요한복음 3장 3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요한복음 3장 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여기서 금방 알 수 있듯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5절)은 ‘거듭나다’라는 표현(3절)과 병행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점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자연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으로 구분되는 두 차례의 출생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표현은, 예수님이 앞서 언급하신 ‘거듭나다’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단회적인 출생’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은, 그분이 ‘거듭나다’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신 내용을 부연하며 이는 다름 아닌 니고데모의 질문(4절)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답변이 니고데모에게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질책하셨다(요 3:9-10). 왜냐하면 당시 니고데모는 성경에 정통한 지식을 갖춘 바리새인으로서 현재 우리가 ‘구약’이라고 부르는 책을 연구하며 그에 대한 엄청난 분량의 신학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제(곧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부가하신 표현(즉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표현)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내용을 파악해야 했을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를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구약성경 어디에 ‘물’과 ‘성령’이 한 문맥 안에 같이 언급되어 새로운 변화를 약속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명확한 대답을 제공하는 본문은 에스겔 36장 25-27절이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하나님은 주전 6세기에 활동했던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여기서 그 변화는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제거하는 맑은 ‘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도 설명된다. 결국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즉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그와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예언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강조하실 수밖에 없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여기에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물과 성령으로 나다’라는 표현에 대한 지금 이 해석은 본문의 이어지는 내용과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야 한다는 자신의 선언이 다름 아닌 계시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말씀이라고 주장하신다. 즉 그분 자신이 하늘로부터 가져오신 계시라는 것이다(요 3:11-13; 참고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기록된 계시인 구약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악과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그 권능으로 구원하시는 패턴도 이미 구약에 제시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신다(요 3:14-15; 참고 민 21:4-9).


결국 이 모든 진리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요 3:16-21).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진리를 믿게 만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Does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Mean in John 3:5?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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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on Carson

돈 카슨은 캐나다 토론토 Central Baptist Seminary에서 석사학위(MDiv)와 영국 Cambridg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취득하고, 일이노이주 디어필드에 위치한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신약학 명예교수로 섬겼다. 팀 켈러와 함께 TGC를 설립하고 2019년까지 대표로 섬겼다.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를 비롯하여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