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현장에서 오래 견디려면
by Michael Osborne2019-09-17

열왕기상 19장 4절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외침에 익숙한 목회자가 많을 것이다. 엘리야가 이제는 더 이상 못견디겠다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외침 말이다. 엘리야는 왜 그토록 괴로움에 휩싸였을까? 바로 전에 그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지 않았던가(왕상 18:20-46)? 물론이다. 하지만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라면, 엘리야에게 찾아 온 것과 같은 권태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굉장했던 주일이 얼마나 자주 우울한 월요일이 되고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매달 목회직을 그만두는 목회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통념처럼 되었다. 상황이 그 정도로 끔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복음적 목회자들이 간혹 월요일에만 우울한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다고 느낀다. 상당히 많은 목회자들이 저임금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하며, 우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욕 상실을 느끼며 사역을 하고 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며,  위기와 갈등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목회자들도 있다. 이런 목회자들의 몸은 강단에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가슴은 복음의 열정으로 더 이상 뛰지 않는다.    

 

목회를 30년 하는 동안 엘리야와 같이 사역을 떠나고 싶고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은 적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아직 목회직에 남아 있다. 나는 말씀을 가르치고, 성찬 예식을 집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세 가지 핵심적인 결심이 나를 목회직에 계속 남아 있도록 도와주었다. 


첫째, 목회 중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어리석게도 이 부분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복음주의 목회자 알랜 레드패스(Alan Redpath)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항상 위기 속에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위기의 한 가운데 처해 있든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든지, 혹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든지 말이다.” 목회자들은 아주 형편없이 망가진 사람들을 마주 대하여야 하고, 대적 마귀 그리고 육적인 것과 매일 대립하며 갈등한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 자신도 깨진 혹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목회 사역에는 난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예견한 목회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노스햄튼의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목회자들과 그들의 목회적 돌봄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차이와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악한 이 세상에서 종종 겪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몇 해 전에, 나는 교단 총회에 참석했다. 그때 나는 잠깐 대회장을 둘러 보고 “여기 모인 목회자들은 모두 정서적으로 어떨까?” 궁금해졌다. 즉흥적으로 나는 그 생각을 트윗으로 바꾸고 컨퍼런스를 해시태그해서 내보냈다. 그 트윗의 내용은 이랬다. “천 명의 목회자들이 이번 주 총회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마음이 상하고, 외로움을 느낄 거 같습니까?” 금방 수많은 트윗 팔로워들이 생겼다. 컨퍼런스 장소에서 내 트윗을 본 여러 목회자들이 다가와서 내게 감사를 표현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군가가 자기들의 마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둘째,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기초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역자들이 자신을 편하게 느끼고 (감히 말하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몇 해 전 멘토가 내게 말해준 것처럼,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목회를 해야 한다. 우리가 되기 원하는 모습으로 목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은 1732년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에 ‘롯 안의 사기꾼, 혹은 남자의 고뇌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The Crook in the Lot: Or, the Sovereignty and Wisdom of God Displayed in the Afflictions of Men)라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거기에서 보스톤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설계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약함과 투쟁과 실패 조차도 말이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믿음으로 무장하면, 우리는 목회를 느긋이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자신의 강점에 집중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도 있다.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있고 시편 기자처럼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6)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게 된다. 세속 문화는 크고, 근사하며, 매끈한 사람을 좋아하고, 작고 평범하며 신실한 사람을 폄하한다.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세속 문화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다.  


셋째, 목회 사역을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목회는 홀로 할 수 없다. 도우미가 필요하고 친구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고 크게 외쳐도, 목회자 대부분은 메시아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에 선물로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쨋든지 신학교 학위와 올바른 신학, 은사와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의 도움과 성도들이 협조만 하면 우리가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이 가장 외로운 사람들 중의 한 부류라는 것은 사실이다. 연구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의 약 70퍼센트가 가까운 친구가 없다고 말한다. 2009년 릴리 기금(Lilly Endowment)의 지원으로 진행된 세 개의 기독교 교단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다른 목회자들과의 친구 관계가 부족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친밀감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참석하지 않으려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목회자들이 이런 점을 주의하지 않는 한, 목회는 그들에게 고립을 주는 과제가 될 뿐이다.    


나는 전형적으로 내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알고, 좋아하며, 수긍하며, 웃게 만들고 건강하게 지켜주는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친구가 되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어떤 소그룹에 속해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점과 실패까지도 알고 있는 다섯 명의 남성들과 매주 수요일에 만난다. 신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 목회자와 한 달에 한번씩 점심 식사를 한다. 나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친교를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목회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이지 사역을 나 스스로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의 문제 중의 하나는 자초한 고립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왕상 19:10,14)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신실한 사람들 칠천 명이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았다고 소식을 전했다(18절).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결심으로, 나는 목회가 도전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기쁨을 공급하기 위해 그분의 아들과 영, 말씀과 약속, 그리고 그분의 백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목회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과 더불어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우리가 목회 현장에서 오래 사역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Ministry for the Long Haul

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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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ichael Osborne

마이클 오스본은 플로리다주 올란도에 위치한 University Presbyterian Church의 부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Surviving Ministry' 등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