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by 전재훈2019-08-17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 일로 인해 감옥에 간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자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나타났다.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며,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 것이다. 간수는 죄수가 다 도망한 줄 알고 칼을 뽑아 자결하려고 할 때, 바울이 소리 질러 만류하자 그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는다. 이 때 바울이 한 말이 성경의 유명한 구절이 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말씀은 교회마다 표어가 되었고, 전도지의 핵심 구절이 되었으며, 시골 버스 정류장에 가장 많이 쓰이는 교회 경구가 되었다. 지금도 교회 정문에 달려있는 LED 전광판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성경구절이다. 그만큼 바울의 선포는 한국교회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는 말씀이 되었다.


빌립보감옥 사건을 가만히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다. 바울은 루스드라에 들려 디모데를 전도팀에 합류시켰다. 그 후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 환상을 볼 때부터 누가도 전도팀에 합류한다. 결국 빌립보에 들어갔을 때 바울 일행은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누가까지 네 명이었다. 하지만 귀신들린 여종을 고친 일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바울과 실라 뿐이었다. 디모데와 누가는 왜 빠진 것일까?


귀신들린 여종을 고친 사람은 바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라가 함께 붙잡혀 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약간의 상상을 해 보자. 바울은 말과 행동 그리고 복장까지 유대인이었다. 실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하지만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고, 줄곧 루스드라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말과 복장 등은 유대인보다 헬라인에 더 가까웠다. 누가는 그냥 헬라인이었다. 빌립보 사람들 눈에 바울과 실라만 이방인으로 보였고, 자연스레 바울이 잡혀갈 때 실라도 함께 잡혀갔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실라와 디모데를 단순 비교하면, 귀신은 바울이 쫓아냈는데 실라는 생긴 것이 바울과 같아서 잡혀가고, 디모데는 그렇지 않아서 잡혀가지 않았다. 실라는 억울하다고 느끼고, 디모데는 다행이라고 느꼈을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고, 바울이 간수에게 세례를 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실라는 이 모든 것을 바울과 함께 경험했고, 디모데는 전해 듣게 된다. 여전히 실라가 억울하다고 느끼고, 디모데가 다행이라고 느낄까? 어쩌면 디모데가 실라를 부러워했을 수도 있다. 실라는 바울과 비슷하게 생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바울의 유명한 말을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반면 디모데는 생긴 것이 바울과 달라서 그 놀라운 경험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대는 이런 상황에서 실라와 디모데 중 누가 부러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고 내 마음의 구주로 영접한 후 많은 이들이 고난과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 좁은 문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듯한 고난을 느낄 때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고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기도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고, 같은 이유로 감격스러울 때도 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제자들에게 했던 말이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하였고,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고 했다.


고난에 대한 이런 말씀들은 성경에 차고 넘치게 나온다. 심지어 히브리서 12장에는 ‘징계가 없으면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까지 나온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7-11)


고난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고난이 오면 최소한 좌절하거나 절망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고난 앞에 쉽게 마음이 무너지고 좌절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시온의 대로’와 ‘만사형통’을 구할 때가 많다. 마치 디모데처럼 감옥에는 안가면서 실라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바울의 선포를 듣고 싶어 한다.


우리의 선택지가 디모데와 실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칭찬과 보상이 아니라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제 삼자인 양 구경만 하고 있는 누가도 존재한다. 디모데와 실라, 바울과 누가 중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당신이 목회자라면 바울이나 실라를 택할 것이고, 성도라면 디모데와 누가를 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런 고난 없이 하나님의 영광만 누리며 사역하기보다 사역자의 길에 들어선 이상 억울하게 매 맺고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로마에 가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한 번쯤은 바울과 같이 쓰임 받고 싶은 목회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순교자의 각오를 가지고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찬 323장)을 담대하게 부를 수 있는 분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비록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아골 골짝 빈들’과 ‘소돔 같은 거리’는 가기 싫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을 부르기 두려워한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 같은 거리’는 무섭다. 그렇다고 가만히 구경만 하는 누가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결국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디모데와 실라 뿐이다. 감옥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서 설교하는 자가 되거나 하는 것뿐이다.


비록 디모데와 실라로 대표되는 두 선택지를 제시하지만 핵심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라가 선택하여 감옥에 간 것도 아니고, 디모데가 가기 싫어서 안 간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처럼 우리의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우리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뒤를 돌아보자. 그리고 지금 처한 상황들을 둘러보자. 고난이 보이지 않는가? 아무리 대형교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역자들이라도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고난을 겪고 있다. 마치 고난이 없으면 사역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 같은 상황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고난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면 우리가 기대할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고난으로 인해 인내가 생기고 징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리고,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늘 우리의 현실은 첩첩산중이고 설상가상이다. 고난의 총량을 넘어섰다고 여겼는데도 고난은 계주하는 선수마냥 바통을 이어받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바닥을 치면 이제 올라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바닥에서 주저앉아 땅을 파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으면 그 다음에는 주님이 나타나셔서 만선의 기쁨을 누려야 할 것 같은데, 점점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이 내 능력이 되고 전문성이 되어가는 것처럼 좌절하게 된다. 가만히 둘러보니 내가 있는 자리가 아골 골짝이고,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소돔 같은 거리라고 느껴진다. 우리는 점점 목사가 아니라 도인이 되어 가고 있는 기분이다.


정신 차리고 빌립보 감옥으로 다시 가보자. 거기에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누가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귀신의 멍에에 매여 신음하며 살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멍에가 벗겨진 여종이 있다. 벗겨진 멍에로 인해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랫동안 죄수들과 씨름하며 그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이 흘리는 피 냄새를 맡으며 살다가 이제는 칼을 뽑아들고 자결하려는 간수가 있다. 바울과 실라는 그 칼을 멈추게 했고,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을 얻을 귀한 말씀을 전해 주었다. 그들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모습이 아니었고, 온 몸에 멍과 핏자국이 가득한 죄수의 모습이었다.


다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거기에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누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들린 여종이나 자신을 향해 칼을 뽑아 든 지하 감옥 간수가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실라보다 더 확실하게 내 멍에를 가져가신 분이 보이고, 온 몸에 멍과 핏자국이 있는 바울과 실라가 아니라, 온 몸에 채찍 자국이 있으며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이 보인다. 그분은 우리가 받았어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참 자유를 주셨다. 그분은 내가 죽었어야 할 칼을 대신 받아 죽음의 길을 가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나를 향한 모든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에서 홀로 담당하신 그리스도시다. 더 이상 내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내 칼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다. 고난이 더 이상 저주가 아니고 칼이 더 이상 나를 해하지 못한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아골 골짝 빈들이라도 생명이 피어나는 부활의 언덕으로 변할 것이며, 소돔 같은 거리라도 사람들이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축제의 거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주님이 바꿔 놓으신 그 다가오는 미래를 바라보며, 그 기대와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이 눈물이 변하여 웃음이 되게 하고, 고난 중에서도 춤 출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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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