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도 아우구스티누스가 필요하다
by Bryan Litfin2019-09-03

2017년에 출판된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은 광범위한 기독교 독자층을 사로잡으며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성공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는, 쇄도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상반된 입장을 견지해 온 보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점이다. 드레허는 “너무 늦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이젠 더 이상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중심이 된 미국 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준비가 됐든 그렇지 않든, 상황은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드레허가 지적하는 포인트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 그는 뒤로 돌아가는 길이 곧 전진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산을 활용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세기의 수도사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가 갑자기 우리의 대안이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여기서도 드레허의 판단은 옳았던 것이다. 그는 미래란 과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은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존재해 왔으며, 우리는 작금의 새로운 암흑 시대를 맞이하여 역사의 교훈을 잘 배워야 하는 상황에 있다.


‘베네딕트 옵션’의 부제는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A Strategy for Christians in a Post-Christian Nation)이다. 물론 기독교의 기본 정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것은 우리가 속한 국가나 사회만이 아니다. 이미 복음주의 교회마저도 탈기독교화되었다. 지난 40년 간 교회가 쏟아부었던 노력, 즉 기독교 신앙을 시대정신에 ‘상황화’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사회적 또는 도덕적 구조보다는 교회 자체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되었지만, 그들 중 우리 같은 사람으로 변화된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이런 현상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만일 목회자가 너무 오랫동안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변질되고 만다. 혹 기독교 신앙을 비신자에게 상황화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고결한 목표를 가지고 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당신은 곧 당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같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를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한다면, “당신은 곧 당신이 바라보는 대상과 같이 된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신이 속한 사회가 권력, 재물, 쾌락을 숭배한다면,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그 우상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서 겉모습이 화려한 연예인이나 인기 있는 전문가가 추앙받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전략을 따라하게 된다. 또 어느 회사나 단체가 국제 무대로 진출하여 새로운 도약을 하는 성장을 보일 때, 당신 안에 잠재된 기업가 정신이 깨어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목회자는 유명 인사가 되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다가, 결국에는 CEO처럼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이 교회 안에 있는 양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예외적인 모습도 있다. 과거에 교회를 섬겼던 주교나 장로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교구에서 신실하게 섬기다가 순교로 마감하는 사역을 열망했다. 그들의 목표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속한 어느 공동체에 머물며 꾸준히 섬기는 데 있었다. 이렇듯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소규모의 삶, 내실을 다지는 삶, 지역을 섬기는 삶,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한 삶이 전혀 무력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며 축소된 삶을 지향했던 그들이 결국에는 로마 제국을 정복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에 꾸준히 적용되어 온 그들의 지혜가 오늘날에도 다시 한 번 적용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 프로젝트


고대 사회에 목회자로 소명을 받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예증하는 데 아우구스티누스만한 인물이 없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묘사된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은 그를 방탕한 시절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밀라노의 어느 정원에서 하나님을 만난 인물 정도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가 회심한 장면은 드라마 같다. 죄 짐에 눌려 고뇌로 가득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께 반항하기를 그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늘 안식이 없던 그의 마음은 그제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하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남은 생애, 즉 목회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여생은 안일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고백록이 아니라, 그의 다른 저술이나 설교문과 더불어 특별히 그의 제자 포시디우스가 기록한 전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런 자료들을 통해 오늘날 목회자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의 목회 사역에서 얻을 수 있는 세 가지 교훈을 아래에 제시했다. 이는 새로운 반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혜롭게 앞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것이다.


1. 수도사의 마음으로 살라


아우구스티누스가 교회의 일꾼이 되어 아프리카 히포에서 목회 사역을 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그는 외딴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형제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뜻밖의 요청을 수락한 이후로도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소명을 잊지 않았다.


포시디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식과 의복 문제에 있어 균형을 지키며 지나친 탐욕이나 그릇된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누군가가 사치품이나 땅을 교회에 기증하면, 그것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그 수입을 나누어 주었다. 더 나아가 그의 식단에도 절도가 있어 활동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면서도 부자들처럼 탐욕스럽게 먹지 않을 만큼의 양만 유지했다. 그리고 식사 시간에는 지적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대화를 했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부재중인 친구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람은 이 식사에 참여할 수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 거룩을 추구하는 일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여자들은 그의 집에서 살도록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 자신이나 다른 형제들이 여자들과 따로 있는 일도 허용되지 않았다. 유혹이 찾아들거나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재물에도 초연했다. 그의 재정은 믿을 만한 직원들이 관리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할 뿐이었다. 직원들은 연말이 되어서야 아우구스티누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회계 장부를 보여 주었다. 그는 그저 일용할 물품을 교회에서 받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당신의 양 떼에 집중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회중을 돌보는 데 주력했다. 그렇다고 바깥 세상에 무관심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 수도였던 카르다고에서 열린 공회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늘 히포에 있는 그의 양들에게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맡은 중요한 의무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문제를 판단하는 일까지 포함되었다(고전 6:1-8). 이는 매우 까다롭고 어려웠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일을 매우 진지하게 수행했다. 이 사역을 통해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정의를 베풀었는데, 이는 당시 타락한 세속 법정에서는 뇌물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지혜와 기지를 발휘하여 도시의 권력자들 앞에서 자신이 목양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자주 변호했다. 그 교회의 과부와 고아, 그리고 병든 자들 가운데 그의 따뜻한 목양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올바른 교리를 양 떼에게 가르쳤다. 그는 높은 수준의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시대를 분별하며 당시에 만연한 문화적 폐해를 간파할 줄 알았다. 펠라기우스주의나 도나투스주의와 같은 이단 사상이 발현했을 때, 그는 재빨리 그 해악한 신학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했다. 이처럼 그는 건전한 교리를 식별하는 지혜와 그 교리를 수호하는 용기, 그리고 바로 그 가르침을 따르도록 성도들을 이끄는 목회자의 사랑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 떼의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목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야만인을 두려워 말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말년에 반달족이 북부 아프리카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자들은 스페인에서 건너와 로마제국의 성읍을 하나씩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매우 난폭해서 살인, 강간, 고문, 방화가 잇따랐다. 그들은 많은 이들을 노예로 삼고 교회까지 약탈했다. 당시 그들의 파괴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래서 여러 신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아와 그 무시무시한 적군을 피해 달아나도 괜찮은지 물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지혜롭고도 용기 있는 답변을 제시했다. 포시디우스는 그 답변이 담긴 편지를 남겨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일반 성도들을 향해서는 야만인을 피해 달아나도 괜찮다고 말하지만, 목회자를 향해서는 양 떼가 모두 피할 때까지는 반드시 뒤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가 섬겨야 하는 교회를 버릴 수 없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코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목회자가 품은 거룩한 소명 의식은 야만족의 테러라도 꺾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직자로 임명된 사람에 의해 성례가 베풀어져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견해가 목회자는 반드시 성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무엇보다도 영혼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더 큰 관심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회자의 “직분 없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가 박해에 직면해서도 성도의 영혼을 위해 남는 일은 요한일서 3:16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죽는 날까지 목회자로 살았던 사람


주후 430년, 연로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때 참회의 시편들을 묵상했다고 한다. 당시 성벽 밖에서는 여전히 반달족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열흘 동안, 아우구스티누스는 계속해서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다. 포시디우스는 이렇게 상기한다. “병들어 눕기 직전까지 그는 뚜렷한 정신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힘과 열정을 다해 쉼 없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돌보던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명예로운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하나님의 가난한 종으로 물려줄 만한 재산이 없었기에 굳이 유언장을 쓸 필요도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기고 간 게 있다면, 그의 신실한 제자들과 능력 있게 전했던 말씀이 전부였다.


모든 목회자가 그와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의 유산을 남겨 명예롭게 생을 마감하며 평생의 복음 사역을 다음 세대가 이어가리라는 확신 가운데 잠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 야만인이 문밖에서 아우성치더라도 말이다.



원제: Why We Need More Pastors Like Augustine: Retrieving Ancient Pastoral Practic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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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Bryan Litfin

브라이언 릿핀은 Moody Bible Institute에서 16년간 신학과 교회사를 가르쳤으며, Moody Publishers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대표 저서로 'Early Christian Martyr Stories'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