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홍해를 건넜다!
by Tim Keller2019-09-10

신약성경의 안내에 따라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 구약의 한 본문이 있다. 바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는 출애굽 기사의 본문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40년 전,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 위치한 R. C. 스프로울(Sproul) 박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집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 집에는 영국의 구약학자 알렉 모티어(Alec Motyer)가 머물고 있었고, 나 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프로울이 모티어에게 청했다. “어떻게 구약이 신약과 연결되는지 우리에게 좀 이야기해 주실래요?” 이에 모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말을 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중 한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물었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며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 양의 피를 집에 바르고 도망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지도자를 따라 도망쳐 나온 후로는 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죠. 갈 길이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이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고 또 성막을 주셔서 그분의 은혜와 용서를 경험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본향에 도착할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시죠.’라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거의 똑같이 고백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나는 그 말에 놀라며 생각했다. ‘과연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를 읽으며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사실을 말해 왔다. 지금도 다른 종교들이 어떠한지를 수시로 확인한다. 혹 누군가가 “그렇다면 여기 이 종교는 어떻습니까?”라고 지적하며 나한테 마치 속았다는 듯 비난할 때, “그 종교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라고 반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기독교 외의 다른 모든 종교는 다리를 놓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먼저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더 이상 다리를 놓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중단된 다리를 가끔씩 볼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 생활이 그와 같다. 이러한 종교 생활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 건넜다는 느낌을 가질 순 없으며, 그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를 통해 그처럼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방금 전까지 거듭나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조금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순식간에 그분의 자녀가 된다. 여기에는 과정이 없다. ‘흑암의 권세’에 속했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속했든지 둘 중 하나다(골 1:13). 기독교의 유일성을 드러내는 이 진리, 즉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구절이나 이미지를 한번 떠올려 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와 같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즉각적으로 옮겨진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가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할 때 참고하던 일종의 시금석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에 겸손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글쎄요,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로이드존스는 설명하기를, 그런 대답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조금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대답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아래와 같이 단번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 이전에는 ‘저’ 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이’ 나라에 속해 있다.

2. 이전에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외인’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가족’이 되었다.

3. 이전에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4. 이전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칭의’를 얻은 상태에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은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권능에 대해 알고 있는가?


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다


2002년에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은 ‘헤븐’(Heaven)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비록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거기서 블란쳇은 여배우로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는 어느 도시의 특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약 거래상이 그 지역에 사는 아이들의 삶을 망쳐 놓는 상황을 소개하며 바로 그 상황에 분개한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경찰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는 스스로 마약 거래상의 사무실을 폭파시켜 그 거래상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야간 경비원이 쓰레기통에서 폭발물을 발견하고 엘리베이터 안에 두는 바람에 그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다른 네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그 사망자 안에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다. 결국 아이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살리기 위해 일을 계획했던 블란쳇은 자신의 노력이 오히려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이 대목에서 블란쳇이 보여 준 탁월한 연기 덕택에, 우리는 육신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한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결국 그녀의 삶은 타다 남은 잔해와 같이 황폐해져 죄책감과 수치심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똑같이 느꼈던 사람이 성경에 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바울이다. 그런데 그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인생의 실패를 보상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 왔다.” 율법에 갇히게 된 인간의 마음은 그런 말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거짓된 겸양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단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내면의 변화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놀랍게 변화되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나 도덕적인 노력과 상관없이 은혜로만 구원받죠. 하지만 믿는 것만큼은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전심으로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구원받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이에 대해 성경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을까?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어가고 물은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니”(출 14:21-22).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바다를 건넜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건너갔다고 할 순 없다.


누군가는 바닷물로 세워진 벽을 따라 걸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와, 이 광경을 좀 봐!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잖아! 애굽인들아, 이제 너희는 상대가 안 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


하지만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이러다 물이 덮치면 어떡해! 죽을지 몰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찌 되었든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믿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이 구원을 받았다. 모두 다 바다에서 건짐을 받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믿음의 정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원은 믿음의 ‘대상’으로 인해 받는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이에 대해 성경은 바다를 건너는 일이 오직 은혜로만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중략]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라고 외친 모세의 말에 관해 설교한 적이 있다. 거기서 스펄전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순간, 구원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자신이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확신하건대, 여러분은 ‘가만히 서 있기’가 매우 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서 있기는, 주님의 군사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년의 가르침을 통해서야 겨우 배울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전사에게는 가만히 있기보다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일이 훨씬 쉽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서 있기란, 사람이 세운 일반 군대에서는 처음에 배우는 기초 훈련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대장의 지휘 아래서는 가장 배우기 힘든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며 그 어려움을 나타냈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시련의 한복판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자세는 노련한 정신과 오랜 경험, 그리고 엄청난 은혜가 아니면 보여 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의 죄와 사망을 하나님이 다 처리하셨기에, 지금 붙들고 있는 그 문제들은 사소한 일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앞에서 큰 난관을 만난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그분이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똑똑히 보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et Out! Tim Keller on the Exodus Story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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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