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발자취
by Adriaan C. Neele2019-07-16

‘구속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가 죽은 후 출간된 서적이다. 이 책에 실린 1739년의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성해 질 것이고 훌륭한 책들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그리고 터키에서 출판 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뿐만 아니라 덜 배운 사람들도 이제 종교에 대해서 아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가 귀를 기울일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3-4).


에드워즈는 이사야서 구절을 통하여 지금 전 세계가 ‘복음 전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 동시에 중국, 동인도, 그리고 남아메리카 선교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드러냈다. 그는 아마도 바로 다음 세기인 19세기에 개신교 선교의 위대한 시대가 펼쳐지고 자신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예견하고 이 설교를 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설교와 사역은 전 세계로 퍼져서 많은 선교사, 선교 단체 및 선교 출판에 큰 자극이 되었다.


19세기 선교사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먼저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영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칼빈주의 침례교 목사이다. 번역가이기도 한 그는 인도에서 수십 년 동안 봉사한 사회 개혁자이기도 하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은 현재는 미얀마로 불리는 버마에서 37년간 사역한 미국 회중교 선교사이다. 그는 나중에 소속을 침례교로 바꾸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는 무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에서 사역한 영국 선교사이며 중국내륙선교(OMF, 1865)의 설립자이다. 로티 문(Lottie Moon, 1840-1912)은 해외선교보드(FMB) 소속으로 중국에서 거의 40년 가까운 생을 선교에 바친 남침례교 선교사이다. 그리고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1867-1951)은 영국 성공회 소속인 제나나선교회로부터 인도로 파송 받은 후, 도나버에 고아원을 세우고 무려 55년간 선교 사역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복음과 선교 사역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선교지였던 해당 지역에 현재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 뒤로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러나 이들 뿐만 아니라 이름이 잊혀진 수백 명의 선교사들도 있다. 여기에는 파리 복음주의선교사협회(PEMS)에서 파송되어 오늘날의 레소토이자 그 당시에는 바수톨란드로 불렸던 지역에서 선교한 프랑스인 유진 카살이스(Eugène Casalis, 1812-91), 토마스 아보셋(Thomas Arbousset, 1810-77), 아돌프 마빌(Adolphe Mabille, 1836-94)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사람의 사역 기간을 합치면 무려 60년이 넘는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세소토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또한 영어와 세소토어의 첫 번째 사전을 편찬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 초등학교 뿐만 아니라 모리야 신학교를 열었으며, ‘바소토의 작은 빛’이라는 신문사도 만들었고, 레소토 복음주의 교회도 세웠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들은 지역 사람들의 자립을 도왔으며, 궁극적으로는 레소토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데 필요한 기초를 쌓는 일에 기여했다. 그들이 시작한 이 운동은 지금도 레소토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도 나이지리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인 메리 슬레서(Mary Slessor, 1848-1915)가 있다. 그녀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여성의 권리와 원주민 자녀를 보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윌리암 화이팅 보든(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으로부터 수학했고 또한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자선 사업가이자 선교사 후보였던 보든은 무슬림을 선교하기 위해 중국의 간쑤 지방으로 가는 도중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카이로에 있는 미국인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중동의 미국 장로교 선교회에서 50년 넘게 일한 앤드류 왓슨(Andrew Watso) 박사의 곁에 묻혔다. 그리고 그 곁에는 ‘이슬람의 사도’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무엘 즈웨머(Samuel Zwemer, 1867-1952)가 묻혀있다.


이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교육자, 행정가 혹은 단체의 운영가로 생애를 보낸 많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 중에서는 레니쉬선교회(1799) 소속의 크리스천 발만(Christian Wallmann, 1811-65)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지역에서 일했던 스웨덴 출신의 선교자 한스 피터 할벡(Hans Peter Hallbeck, 1784-1840)을 꼽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예외없이 기도와 부흥 운동, 또는 서적과 선교 단체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던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1790년대 스코틀랜드 대각성 운동은 존 어스킨(John Erskine, 1720-1803)이 기도 운동을 더욱 촉진하기 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 ‘종교 재건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을 위한 놀라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백한 합의와 가시적인 연합을 촉진하려는 겸손한 시도’(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 for the Revival of Religion and the Advancement of Christ’s Kingdom, 1747)를 다시 발간했을 때 불붙듯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이 복음주의 부흥 운동은 스코틀랜드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1796)의 창립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선교 사업에 있어서 사역과 출판물이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었다. 이처럼 19세기 복음주의 선교 단체는 선교 활동뿐 아니라 중요한 기독교 저작물의 보급 통로였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에드워즈가 쓴 ‘구속 사역의 역사’를 재출간, 번역 및 배포한 것도 도서를 통한 선교 확장의 좋은 사례가 된다. 영국에 본부를 둔 종교소책자학회(Religious Tract Society, 1799)는 이 책을 여러 번에 걸쳐서 발간했다. 이 소책자학회의 설립자는 런던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를 설립한 복음주의자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다. 런던선교사협회는 기독교 교리 연구가인 조지 고거리와 같은 해외 선교사들에게 도서 수당을 제공했다. 조지 고거리는 인도에서 고작 10권의 책으로 도서관 사역을 시작했는데, 그 중 3권은 에드워드의 책이었고 또 그 중의 한 권은 ‘구속 사역의 역사’였다. 게다가 미국소책자학회(American Tract Society, 1825)는 1838년부터 1875년까지 '구속 사역의 역사'를 무려 6만 권 넘게 출판 및 배포했다. 또한 베이루트에 있는 미국선교출판사와 같은 선교 전문 출판사를 후원하기도 했다. ‘구속 사역의 역사’는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어(1776) 네덜란드 공화국에 선교의 필요성을 자각시켰고, 그 결과 네덜란드선교회(Dutch Missionary Society, 1797)의 발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의 첫 대각성 운동이 선교 활동을 일으킨 것처럼,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두 번째 대각성 운동은 자발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는 많은 단체를 창립하도록 이끌었다. 미국선교위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는 '구속 사역의 역사'를 아랍어로 출판하여 카이로는 물론 중동 전역에 보급하였다.


이러한 영어권의 선교 노력은 프랑스어권으로도 이어졌다. 파리 복음주의선교협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의 창립자는 종교 간행물 배포를 위해 종교서적협회 (Religious Society of Books, 1836)를 설립하는 일에 헌신했다. 이를 통해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번연(John Bunyan), 존 칼빈(John Calvin), JC 라일(J.C. Ryle),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등의 저작물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와 ​​레소토, 오세아니아 등지에 배포되었다. 종교서적협회는 또한 ‘구속 사역의 역사’(1854)의 프랑스어 번역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동시에 그 책의 출판은 프랑스 부흥 운동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롬 15:20)이라는 구절에 모토와 목표를 둔 파리복음주의선교협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1821)의 설립과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 초반의 선교사들과 많은 선교협회는 에드워즈의 도서를 익히 알고 있었다. ‘겸손한 시도’(Humble Attempt)의 1823년 프랑스 번역본 서문은 1800년대 후반에 일어난 스코틀랜드 부흥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부흥 운동이 선교 사역과 선교사 그룹의 부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잘 보여준다.


복음의 선포와 여러 선교 협회에 의한 ‘복음주의 부흥기’의 많은 출판 그리고 성경 번역에 대한 헌신은 라미네 산네(Lamin Sanneh)의 말처럼 “사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진실된 문화를 형성하여 기독교가 거부감 없이 뿌리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선교 단체 및 선교사가 지녔던 유럽 식민주의 확대와의 모호한 관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선교사들이 가졌던 모험심으로 인한 갈등의 발생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에드워즈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The Life of David Brainerd)와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의 저널을 캐리가 읽고 이해한 방식은, 복음 전파 및 복음 선포에 대한 깊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그 우려는 다름 아니라 런던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립 설교에서 표현한 것처럼 바로 에큐메니즘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장로교, 독립교단, 주교단, 또는 다른 형태의 교회 질서와 기관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단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전 세계로) 보내고 싶을 뿐이다.” 많은 선교사 협회는 여기에 동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때로는 기존 교회와의 격렬한 긴장 관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선교 사역이 주는 부담을 털어놓는 캐리에게 존 라일런드(John Ryland)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이리 와서 앉아. 하나님이 이방 세계를 구원하고 싶으시면, 그분은 굳이 당신이나 내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어.” 선교 사업의 열렬한 동역자이자 침례회 특별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amongst the Heathen, 1792)의 공동 창립자인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 1754-1815)는 캐리를 격려하고 그가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한 사람이다.


그 결과 오늘날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캐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루실 위대함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비록 미국 개혁교회가 그 초창기에 신학생이었던 즈웨머와 제임스 칸틴(1861-1940)을 후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초교파주의’를 표방한 미국 아라비아 선교부를 1889년에 설립하는 일을 이루지 않았던가.


즈웨머가 지닌 선교 열정의 중심에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 모두를 품고 있다”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그의 마음에는 칼빈이 말했듯이 “이 세상은 복음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극장”이라는 생각과 “선교의 목표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상이 가득했다. 19세기의 선교 전성기를 이끈 많은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생각과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행했다.




출처: www.ligonier.org

원제: The Dawn of Missionary Societies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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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Adriaan C. Neele

애드리언 닐은 University of Utrecht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는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역사신학 교수이자 박사과정 디렉터로 재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프리주에 위치한 Jonathan Edwards Centre at the University의 역사신학 교수이자 디렉터였다. 2007년부터 Jonathan Edwards Centre at the University에서 연구 교수와 디지털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Jonathan Edwards Encyclopedia'의 공동 편집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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