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by 전재훈2019-07-06

당신에게는 존경하는 위인이 있는가? 그가 과거의 인물이든, 현존하는 분이든, 아니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에 불과하든 말이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많은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부모의 돌봄, 선생님의 가르침, 친구들과의 관계, 심지어 동네 형과의 교제로부터도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이들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때론 그분들의 억지스럽고, 강압적이며,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며 실망할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슈퍼맨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나보다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오기도 한다.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선생님이나 친구, 동네 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비록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지만, 그들은 약함을 지닌 인간이기에 온전한 찬양을 받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들이다. 


어릴 적 나의 우상은 주로 책에 등장했다.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암행어사 박문수, 이순신장군, 링컨대통령 등등. 책에서 보는 그들은 지혜롭고 용맹하고 정직했으며, 언제나 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반드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좋아하던 위인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다. 위에 열거된 사람들 외에도 머리에 계속 떠오르는 인물들은 김구선생, 간디 등 전부 남자뿐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예외가 있는데 바로 잔 다르크다.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구한 어린 소녀 정도로 알고 있다. 또한 마녀로 몰려 19세의 어린 나이에 화형 당한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한다. 내가 왜 많은 훌륭한 여성들 중에서 유독 잔 다르크를 좋아하는지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헬렌 켈러, 신사임당, 유관순, 퀴리 부인 그리고 나이팅게일에 이르기까지 내게 영향을 준 많은 여성 위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잔 다르크가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내가 주로 용맹한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혹은 나라를 구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주변인들과 책 속의 여러 위인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고, 위인들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자라면서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인물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어머니의 믿음 덕분에 모태 신앙을 물려받아 언제나 말씀의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 나는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위인들을 만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 이야기는 내가 공기를 통해 숨을 쉴 수 있다는 사실보다 먼저 배웠다. 나는 할머니의 성함보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먼저 들어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다는 사실도 할아버지의 직업보다 먼저 알았다. 일요일이란 말보다 주일이라는 말이 더 편했으며,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대신 놀러 가는 일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나의 가족이었고, 그분의 십자가 이야기는 내 머릿속에 각인된 추억이었으며, 주일 예배는 마치 매일의 식사와 같은 내 삶의 일부였다. 자연스럽게 이순신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알기 전부터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고 또한 바울을 존경했다. 당연히 요셉과 다윗은 내가 본받고 싶은 위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변 사람들이 그리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야기도 다소 각색된 결과물임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에게서도 아쉬운 모습을 보게 되는데, 미국의 위인들이나 프랑스의 잔 다르크가 더 이상 마음에 큰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들은 마치 동화처럼 느껴져서 때때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일하게 내 안에 살아 계셨고, 오직 그 분만 완벽한 인간이었으며, 십자가 이야기는 변함없이 내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과 그분의 역사야말로 절대 흔들리지 않을 내 삶의 굳건한 기반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기반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예수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까? 기독교가 혹시 지배 계층의 통치 수단에 불과한 허상은 아니었을까? 서양이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선교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내세웠고, 나는 거기에 물든 것일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과학은 진리처럼 느껴지는데 성경은 소설처럼 들리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그분의 자녀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알도록 세뇌된 '기독교 문화인'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무수히 많은 질문들이 산 너머 산을 만나듯 내게 다가왔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죄를 지은 그분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고자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왔고, 완벽한 삶을 살다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때에 그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감당하고 죽으셨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사랑을 죄인들에게 부으신 것이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사람이 지어낸 위대한 사랑 이야기, 혹은 비록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선택 받은 백성만을 위한 나와는 상관없는 역사,  아니면 바로 나를 향한 위대한 사랑,  이 셋 중의 하나로 설명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많은 도서의 핵심 주제로, 음악적 영감의 원천으로, 뛰어난 그림의 모델로, 그리고 위대한 인물들의 세계관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만약 이 이야기가 허구일지라도, 십자가 희생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이자 인생의 가치관, 믿음의 실재가 되어야 할 명분이 충분하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가정하더라도, 이를 믿음의 실재로 인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이미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스라엘에 한정된 이야기이거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의 이야기라면, 즉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왜 잔 다르크를 좋아하는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른다. 프랑스가 영국을 이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제국주의 상징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이야기에 아무 관심이 없다.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던 교만한 국가들 사이의 싸움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업적과 용맹스러움은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늘 잔 다르크의 이야기에 쉽게 마음을 뺏앗긴다. 심지어 영국인들 중에도 잔 다르크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잔 다르크를 향한 서사시를 남겼고, 윈스터 처칠 역시 '영국의 탄생'이라는 그의 책에서 잔 다르크를 칭송했다. 그는 잔 다르크 위인전을 쓰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나와 상관없는, 고대 중동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십자가 사거는 세계 역사의 무수히 많은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찬양 받아야 할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천 년의 세월을 지나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나를 위한 구원 사건이라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이천 년 전에 그분의 아들을 이스라엘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또 그 소식을 제자들을 통하여 후대에 전하시며, 한국으로 선교사들을 보내 나의 어머니를 통해 내게 그 사랑을 알리신 것이라면,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진심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주셨음이 인간의 지혜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이듯, 그 사랑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다. 차라리 세계적인 부호인 워렌 버핏이 내 할아버지이고, 그가 자신의 전 재산을 내게 상속하기로 했다는 말이 더 믿기가 쉬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과 워랜 버핏이 당신에게 전 재산을 물려줄 것이라는 이야기 중 어떤 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가? 어떤 이는 워랜 버핏의 재산을 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바란다. 


십자가 사랑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다른 어떠한 유익도 탐하지 않을 수 있다. 더 건강하지 않더라도, 부유하지 않더라도, 또한 이 땅에서 내 몫의 명예는 전혀 없더라도, 내게는 십자가 사랑과 영원한 구원이 있기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혹 몹쓸 질병에 걸리더라도, 궁핍해지거나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이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토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것이기에, 내가 바울처럼 목 베임을 당하더라도 또한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면 감당할 것 같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감동과 순종의 마음이 비단 내게만 찾아왔을까? 그대도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는 그분의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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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