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사랑
by 전재훈2019-06-2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와 당신이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에 처하지 않도록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그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고 또한 의롭다 여겨지게 되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자녀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면서, 또한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결코 묵과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에 대한 분명한 심판을 정해 놓으셨다. 그 심판의 정상에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를 지기 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핏방울이 땀과 같이 흐르도록 기도하신 모습은을 통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단순히 몸의 모든 피를 흘리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겪어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의 상징이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곧 죽음보다 더한 버려짐의 고통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질 만한 어떤 죄를 지으신 분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을 가장 온전하게 사랑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받아야 할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버려짐의 고통을 받은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버려지지 않고 가장 큰 사랑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최고의 사랑을 받아야 할 분은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정작 고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무한한 사랑의 수혜자가 된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지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대표가 되셨다. 그렇게 우리가 받아야 할 죽음을 대신 받고 또 우리가 받아야 할 버려짐을 대신 받으셔야만, 나와 당신이 생명과 사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내어 주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의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가장 선한 사람을 극한의 고통으로 밀어 넣으신 것인가?


어떤 이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떠올리며 십자가의 심판을 불편하게 여기고, 또 다른 이들는 정의로운 하나님을 믿기에 십자가의 대속을 싫어한다. 전자는 마치 사랑의 하나님이 족쇄와 같은 율법을 주셨을 리 없다며 율법을 폐기하려 드는 것과 같다. 또한 후자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율법주의자의 모습과 같다. 즉 십자가는 율법폐기론자들에게는 폭력으로 인식되고,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한 가지 특성만을 나타내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가장 온전히 보여주며 또한 공의로운 능력과 지혜까지 증명한다. 고린도 전서 13장에 따르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심'은 공의를 뜻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공의는 곧 사랑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공의로우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면서도 과연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심판을 받아야 할 죄가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죄는 주님이 받으신 채찍질이나 조롱 정도로 속죄 받을 수 있지만, 온 인류의 죄를 합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려지는 고통을 받아야 할 만큼 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접근을 하게 한다. 달리 말해 만약 역사상 죄를 지은 인간이 나 하나뿐이고 하나님이 그런 나를 너무나 사랑하셨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흘리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저 손끝에서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이면 족하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럴까?


인류의 죄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분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이들을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 천국이었다. 하나님과 동산을 거닐 수 있었고, 가난이나 질병 혹은 폭력인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오직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류에게 주어진 금령이라고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선악과는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약 그 과일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산에 올라가 아무 버섯이나 먹으면 해롭듯이 선악과에 독이 있어 그 과일을 먹으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독버섯과 선악과는 전혀 다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존재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해도, 죽음을 부르는 선악과를 만들고 또 이를 가장 눈에 띄는 동산 한가운데에 두신 것은 분명 그분의 짓궂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범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해석할 때에 그분의 사랑을 기초에 두어야만 제대로 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선악과의 존재 역시 사랑의 하나님이 행하신 그분의 일하심이다. 


만약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창세기 39장에는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온다. 그런 요셉을 왕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데려와 집안의 허드렛일을 시키게 된다. 요셉이 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동행과 그로 인한 범사의 형통함을 본 보디발은, 어린 요셉을 가정의 총무로 삼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위탁한다. 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은 집을 비우기 일쑤였기 때문에, 총무의 권한을 받은 요셉은 그가 없는 집에서 마치 집주인처럼 오만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은 그 집의 주인이 아니라 위탁받은 종의 신분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에덴동산도 그와 같다. 만약 선악과가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잊은 채 스스로가 그 동산의 주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선악과를 볼 때마다 그들은 자신이 그곳의 주인이 아닌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류가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임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다.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으로 살기보다는 모든 일에 능하신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행복한 법이다. 결국 선악과는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즉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그 사랑에 잘못된 방식으로 반응했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고 생명나무에는 더 이상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남자는 일하는 고통을,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며, 모든 인류는 죽음의 저주 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이 얼마나 큰 진노를 불러왔을까? 


창세기 29장에서 야곱은 삼촌 라반의 딸 라헬을 사랑했다.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야곱은 삼촌에게 7년 동안 무보수 노동을 제공한다. 하지만 드디어 결혼을 하는 날,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라헬 대신 그의 언니인 레아를 들여보냈다. 이 일은 분명 야곱의 분노를 일으킨다. 과연 어느 만큼 화가 날까? 그의 분노는 라헬을 사랑하는 크기가와 비례할 것이다. 또한 삼촌 라반을 믿었던 만큼, 그가 일해 온 기간 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만약 야곱이 라반을 아버지처럼 믿었고, 라헬을 목숨보다 더 사랑했으며, 7년이 아니라 70년을 수고하였더라면, 아마도 야곱은 라반을 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와 비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은 그저 과일 한 상자 도둑질한 것 정도로 취급될 수 없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의 해와 달 그리고 별까지, 땅의 모든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 및 다양한 짐승들과 각양의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든 것들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면 그분이 주신 모든 것들이 그 분노의 영향 아래 있지 않겠는가? 즉 우리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하늘의 모든 별이 쏟아지며, 해가 어두워지고, 또한 달이 핏빛이 되어 흐를 수 있으리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 모든 천사가 그것을 보았고 감탄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그분을 배신하고 말았다. 그분이 자신과 같이 여기던 아담과 하와의 죄는 하나님이 지니신 거룩함의 크기 만큼 거대한 진노를 불러왔다. 그토록 엄청난 진노가 십자가로 대변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따뜻한 가정, 행복한 교회, 발전된 과학 문명, 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교제가 이를 증명한다.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에덴동산 하나가 더 큰 복이었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더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선물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보시기에’ 심히 좋은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놀랍도록 큰 사랑’이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는가?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알기보다 스스로가 주인인 양 그분을 통제하려 한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주인이 종에게 하듯 무언가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 자주 하나님을 떠났으며, 걸핏하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일쑤이다. 


놀랍도록 큰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 받을 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된 십자가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죄를 인식조차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채우지 못하고 그 중 일부를 남겨 두셨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십자가보다 더 큰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조금도 남김없이 십자가 위에 부어졌기에 우리는 믿음만으로 그분께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십자가 고난은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위한 유일하고도 온전한 사역이다.


우리는 선악과 대신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말라.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보다도 더 많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죄 가운데 살아간다. 비록 스스로 그 죄를 다 깨닫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죄인이며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죄를 온전히 해결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증거한다. 그리고 그 공의로 인해, 나와 당신은 넘치는 사랑을 받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가장 완벽하게 채워진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를 태초에 그분이 말씀하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이도록 허락한다.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분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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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