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건너뛰고 싶을 때
by Marshall Segal2019-06-25

혹시 주일 예배를 건너뛰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는가? 주간에 잡은 약속에 사로잡혀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 감각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가?


우리는 교회를 싫어한다기보다 주일 오후나 저녁에 좀 더 여유로운 휴식을 바랄 수 있다. 아니면 다음 주간을 그저 빨리 시작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주일을 당연하게 취급하고, 일상적인 업무와 관계, 행사와 활동, 심지어는 수고스러운 작업에 이르기까지, 월요일에 해야 할 일들로 얼른 달려가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서서히 인식도 못할 사이 한주간의 삶을 방해하는 대상으로 전락하여 주변부로 밀려난다.


하나님의 백성이 매주마다 한 자리에 모이는 그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이 어떻게 일상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불편한 신호등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다른 무엇인가를 주중에 예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


예배를 건너뛰고 싶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최근에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다.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하며 물질을 숭배하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있을 때, 아모스 선지자는 그들이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암 8:4-5).


이 말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언제 이 예배가 끝나서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꼬'와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건너뛰고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월삭이나 안식일 같은 정지 신호등에 걸려 있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귀에는, 말하자면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가장 달콤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제 집에 가도 된다는 소식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예배를 건너뛰진 않았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을 엄격히 지켰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도 전에, 얼른 예배가 마치기를 바라고 있었다. 삶의 현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빨리 돈을 벌고 싶어 했다.


아모스가 기록한 그들의 말은 그들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안식일만 빼고 나머지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돈이라는 신에게 매일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안식일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명령


여기서 월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매월 첫날에 드려야 했던 예배를 가리킨다(민 28:11-15).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를 드려 매달의 시작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매달 정해진 제물을 드림으로써 속죄를 하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표현해야 했다.


또한 안식일 제사도 매주 드려야 했다(민 28:9-10). 이 역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 시작된 규례이다(출 16:23-29).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출 20:8-10). 누구든지 이 계명을 어기면 죽음에 처해졌다(민 15:32-36). 하나님도 자기 자신과 그 백성의 기쁨을 위해 이 날을 구별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주중의 일을 다 중단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다른 데서는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으로 여기기보다 또 한 가지 의무 사항처럼 여길 수 있다. 물론 예배에는 의무적인 요소가 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신 앞으로 나아오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신 일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시를 통해 하나님은 부담을 주시는 게 아니라, 참된 영광과 지속되는 기쁨을 맛보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과연 이보다 더 달콤한 명령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를 명하실 때, 그분은 우리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마치 여름날에 좋아하는 해변을 누리도록 특별히 하루를 떼어놓으라고 누군가가 촉구하는 일과 같다. 따라서 부담스러운 강요가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초대가 바로 예배에 대한 명령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경고


예배를 드릴 때 주어지는 약속이 영광스러운 만큼, 예배를 드리지 않을 때 주어지는 경고도 엄중하게 표현된다. 만일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주중의 일을 위해, 미묘하게 혹은 아예 공공연하게 예배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곧바로 알아차리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때와 같이 건강하고, 부유하며, 순조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의지하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거짓된 생각에 빠져, 예배를 마치 하나의 장식처럼, 혹 빠져도 상관없는 요소처럼 간주하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안식일을 건너뛰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이상하게도 물이나 양식은 있는데, 기근이 펼쳐진다. 바로 하나님 그분을 찾지 못하는 기근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거두시는 기근은, 물과 양식과 거처를 거두시는 기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재앙이다. 그들이 예배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곧 온 땅을 뒤지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자 하여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진정한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려 함으로써, 어리석게도 광산을 버리고 금을 캐려는 꼴이 되었다. 고작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과 귀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대상에 대해서는 닫히고 말았다.


우리 자신에 대한 경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 또한 저들에게 주어진 경고 못지않게 심각하게 여겨져야 한다. 우리가 만일 미묘하게든 혹은 공공연하게든 예배를 하찮게 여긴다면, 결국에는 하나님 없는 끔찍한 삶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런 삶을 전혀 끔찍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은,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진 않아도, 현재 누리고 있는 세상보다 좀 더 쾌적하고 안전하기만 하면 하나님 없는 천국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주일을 불편하고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는 날로 여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이미 부족할 게 없는 자신의 삶에 첨가된 하나의 부속물처럼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원토록 분리되는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깨닫지 못한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삶의 비극을 끝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자신을 받아주실 거라는 착각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마 7:21). 그러다 자신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그동안 얼마나 교회에 참석했는데 자신을 모르시냐며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마 7:22).


그러므로 혹 '예배가 언제 즘이면 끝날까?' 이런 생각이 마음에 지속된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말씀의 기근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이 영원한 빛이 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0:19)에 당신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시고 또 우리 각자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 주셔서, 우리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그분 자신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예배의 계명을 주신 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곧 알게 될 것이다.


비할 데 없는 모임


그렇다면 예배를 건너뛰고 싶은 유혹에 빠져 어리석은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심판을 받게 되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살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높임으로써 그럴 수 있다. 마치 언젠가 경험할 천상의 예배를 매주일 이곳에서 드리듯 그분을 높이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배의 실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세상 어디에도 이러한 모임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로 삼은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창세 전부터 선택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또한 거룩한 피로 구속받고 하늘의 법정에서 용서받아 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진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땅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며, 우주의 창조자가 그들 안에 거하신다. 이처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되어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부름 받았고, 우주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며 천사들까지 심판하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이런 자들의 모임은 일찍이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모임이 바로 예배이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 모임에 매주 초청을 받는다. 고작 한 시간 반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예배의 실재를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어떻게 주일을 그냥 건너뛸 수 있겠는가? 실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예배하며 천상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고 할 수 있다. 매주 그 경험이 얼마나 익숙하게 느껴지든, 주일 아침에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당신이 한 주간 기다리고, 바라보며, 즐거워할 만큼 경이로운 시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If We Could See Sunday from Heaven

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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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rshall Segal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